touche de pinceau de Van Gogh
불멸의 화가 반 고흐. 이유는 모르겠으나 미술에 조예가 깊지 않은 사람들도 반 고흐 정도는 안다. 고흐 작품의 큰 특징은 굵은 붓터치와 그의 감정─혹은 광기─그리고 동시에 난해하고, 모호한 현대 미술보다 친절하게 그 제재를 관람자에게 전달해 준다. 그리고 무엇보다 고흐의 서사라는 인식틀 혹은 지평이 그의 작품들을 볼 때 많은 영향을 미친다. 오늘날의 고흐는 그의 동생인 테오 반 고흐의 아내인 요한나 반 고흐 봉어의 노력으로 오늘날의 ‘비운의 천재 고흐’가 탄생했다(강은진, 2021, 155-6).
다른 작가들이 자신의 예술을 변호하고, 설득시킨 데에 반해, 고흐는 자신의 예술을 그저 묵묵히 해내고, 고야나 피카소처럼 자신의 명성을 추구하지 않았다. 현시대에 가장 상업적으로 많이 사용되는 작가라는 게 고흐의 예술에 대한 순수한 사랑과 작가성과 대조되는 게 흥미롭기도 하다.
그에게 예술이란 무엇이었을까? 이젤 앞에서 붓을 들면 그가 앓던 정신병을 잠시나마 잊을 수 있었을까? 그에게 예술이란 그의 현실에 대한 도피처 혹은 유토피아였을까?
고흐의 작품들에서 공통적으로 느낄 수 있는 점은 '생동감'이다. 칸딘스키의 추상화가 음악을 표현했다면 고흐의 구상화는 몸짓 혹은 안무를 표현한 것처럼 그의 붓더치는 생동감을 준다. 그의 굵은 터치감과 소용돌이처럼 도는 붓터치가 그러한 생동감의 연유인 것 같다. 인상주의가 시각적 인상에만 집착하여 빛과 색의 광학적 성질만을 탐구한 나머지 미술이 강렬한 정열을 상실하게 될 위험에 처한 상황에서, 고흐는 강렬한 정열을 통해서만 자신의 감정을 다른 사람이 느낄 수 있도록 표현했다(곰브리치, 2019, 554-5).
진리는 현상적 차이를 넘어 동일성을 추구하는 데 반해 예술은 차이와 다름을 추구한다(정낙림, 2012, 73). 따라서 프랑스 대혁명 이후 ‘미술(art)’이라는 말은 새로운 의미를 지니게 되었으며 19세기의 미술사는 결코 가장 성공하고 가장 돈을 잘 번 거장들만의 역사는 아니라는 것이다. 오히려 19세기의 미술사는 용기를 잃지 않고 끊임없이 스스로 탐구하여 기존의 인습을 비판적으로 대담하게 검토하고 새로운 미술의 가능성을 창조해 낸 외로운 미술가들의 역사라고 하겠다(곰브리치, 2019, 503).
고흐의 붓터치는 현상에 정열을 더함으로써 회화의 시각적 언어를 변주시킨 것뿐만 아니라, 그는 붓터치에 감정을 담았다. 이전에 미술이란 망막에 맺힌 상을 이젤 위의 캔버스에 옮기는 객관적 언어로써 존재했었다. 화가에게 회화란 '감정의 장'이 아니었다. 그것은 '실력의 장'이자 '기술의 장'이었다. 하지만 고흐는 그곳에 감정의 필드를 펼침으로써 회화에 정신적인 요소를 의도적으로 부각했다.
예술의 감정적 요소를 의도적으로─혹은 유의식적으로─회화에 도입시킨 고흐는 미술을 심리학, 상담학, 정신의학의 연구 대상으로 만든 장본인일지도 모른다. 그의 붓터치는 어떤 감정을 담고 있을까? 예술의 간파할 수 없는 부정성과 무의식이라는 미지의 영역의 입구인 회화는 인간의 대자성을 증명하는 하나의 상징이자, 오직 현존재만이 누리는 전유물이다.
E.H. 곰브리치, 『서양미술사』, 백승길 · 이종숭 역, 예경, 2019.
강은진, 『예술의 쓸모』, 다산북스, 2021.
정낙림, 『니체와 현대예술』, 역락, 20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