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 festin des points
밤하늘의 은하수를 보면 동일자들의 집합과도 같다. 항상이라는 권력의 응집체가 구심력이 되어 행성이라는 천체를 붙잡듯이, 저 광활한 우주에도 '그들'은 있다. 이 우주에서 점보다도 작은 존재감의 행성인 지구에만 '우리'와 '그들'이 있는 게 아닌 것처럼, 밤하늘의 별들은 그들만의 향연을 빛으로 드러낸다.
저 점은 어느 행성이며, 누가 살고 있을까. 저곳의 존재도 우리를 응시하고 있을까? 저 빛은 그리움이 맺힌 상일까 아니면 나를 응시하는 시선일까.
김환기의 작품은 수많은 점들을 볼 수 있다. 밤하늘을 보며 조국과 지인, 가족들을 그리워했기 때문일까? 아니면 뉴욕이라는 대도시에서 자신의 존재감이 저 점과도 같이 미약했음을 표현한 것일까? 저 점은 어쩌면 일개의 개인일 뿐인 나 자신의 초라함과 어딘가에 소속되고 싶어 하는 소망이 담긴 엠블럼은 아닐까.
<9-XII-71 #216>은 다른 작품들과 같은 양식임에도 원형이라는 저 형태 때문에 나를 바라보는 눈동자와 같이 보인다. 저 차가운 파란 눈은 나를 바라보며 무슨 생각을 할까. 나를 동정하는 것일까 아니면 초라하게 바라보는 것일까. 회화는 바벨의 언어로 나에게 말을 걸지 않기에 나는 그 아담의 언어를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저 회화가 나를 바라보고 말을 걸고 있음은 분명하다. 서로 말이 통하지 않는 외국인처럼 우린 그저 각자의 언어로 오해를 낳고, 위로받으며 때론 초라해질 것이다.
별을 바라보는 이유는 무엇일까? 별이라는 대상을 그리움 혹은 선망의 대상으로 치환하여 그 닿을 수 없음을 체감하기 위해서일까? 행복, 이데아, 아름다움 등 우린 많은 것들을 별에 비유하며 멀리서 바라보기만 한다. 그 존재가 불확실함에도, 그 존재와 같은 시공간에 있음이 확실치 않음에도 우린 고개를 들어 별을 바라본다.
우리는 점이다. 동시에 별이다. 도형, 선분, 면, 입방체는 모두 점의 집합이다. 어딘가에서 분명 나는 점에 불과하다. 하지만 나는 가끔 도형이 되기도 하고, 입방체 되기도 한다. 가끔 나는 외딴곳에 혼자 있는 별이다. 하지만 때론 은하수에 포함된다.
김환기의 별은 그리움과 동시에 타자로써 느껴보고 싶었던 소속감의 결정이자, 동시에 그의 예술 언어 그 자체다. 그에게 우주란 단지 위를 바라본 현상이 아니라 세계이며, 그의 존재가 딛고 있는 지평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