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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현실주의는 무의식을 그린 것이 아니다

vous n'est pas un dessin de inconscient

by 오경수
달리_저녁의 거미.jpg 살바도르 달리(Salvador Dalí,1904-1989) - <저녁의 거미>(1940)

무의식을 그렸다는 달리의 초현실주의. 그는 스스로 프로이트의 제자를 자처하며, 인간의 심연인 무의식을 회화로 표현했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그의 그림은 의식적으로, 논리적으로 혹은 이성적으로 이해하기 어렵다. 고체여야 하는 사물은 길게 늘어져있고, 일상의 오브제가 에로티시즘을 암시하는 것처럼 보여서 더 이상 범인의 사물이 아니라 비범한 존재가 된다.

프로이트는 인간의 의식을 유의식과 무의식으로 나누었으며, 동시에 자아를 셋으로 나누었다. 무의식은 빙산의 일각과도 같아서 우린 그 심연을 온전히 이해할 수 없으며, 또한 본인도 본인을 모른다는 결론을 도출하게 만든다. 그의 무의식이론으로 인해 데카르트 이래로 자명하던 주체라는 갑옷을 부서졌고, 결국 주체란 온전하지 않고, 불완전한 껍질임이 밝혀지게 된다. 프로이트는 무의식을 특히 성적인 것과 연관을 많이 짓는다. 그것을 범성욕론이라 하는데, 무의식적으로는 무엇인가 성적인 에너지의 응어리가 있고, 그것이 외견상 성적으로 생각되지 않는 행동에 동기를 부여하고 있다는 이론이다. 결국 모든 것은 리비도에 의한 것이며, 리비도를 위한 것이라는 게 이 심리학의 거장이 말하는 바이다. 그래서 우린 초현실주의 회화에서 더더욱 섹슈얼한 엠블럼을 찾게 되는 것일까?

살바도르 달리(Salvador Dalí,1904-1989) - <메모리 지속성의 붕괴>(1954)

달리로 대표되는 초현실주의 화파의 작가들은 그들이 엿본 순간의 무의식을 캔버스에 담았다. 이를 위해 숟가락을 들고 잠으로써 잠든 순간 바로 기상할 수 있도록 노력했으며, 유의식에서 벗어나 무의식의 경지에 도달하기 위해서 극소량의 무화과만 먹고 생활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져 내려온다.

인간은 꿈을 꾸는데, 프로이트는 이것을 무의식의 작용으로 해석했다. 따라서 꿈에서 나는 내 무의식의 일부를 접하게 되고, 그로 인해 내가 모르던 나의 뒷모습을 보게 된다. 뿐만 아니라 깨어있는 상태에서 보는 환상이나 착각 또한 그러한 무의식의 작용이라고 하는데, 초현실주의 작가들은 그 짧은 순간 목격한 현상(phenomenon)을 캔버스에 표현한 것이다.

이성의 영역이 아닌 무의식의 영역을 표현한 작품이기에 초현실주의 작품은 논리적으로 이해가 가지 않으며, 비현실적이다. 아니, 말 그대로 현실을 초월하여서, 우리의 현실이라는 감각질과 인식틀로는 이해할 수가 없다.

무엇보다 재미있는 사실은 초현실주의자들의 강령에 의하면 이 사조의 아버지라고 불려도 마땅한 프로이트는 이들과의 접점을 부정했다는 사실이다. 프로이트는 그들이 그린 것은 무의식이 아니라 의식적인 것이라 말하며, 그들의 사조를 부정했다. 초현실주의자들의 말한 들어보면 그들이 무의식이론의 예술화(artify)한 것이 타당하다 느껴지지만, 그 이론의 창시자인 프로이트의 입장을 들어보면 나는 프로이트의 담론이 보다 타당한 것 같다.

달리_내란의 예감.jpg 살바도르 달리(Salvador Dalí,1904-1989) - <내란의 예감>(1936)

프로이트의 후계자를 자처하는 라캉은 무의식은 언어처럼 구조화되어 있으며, 언어로 인해 형성된다고 했다. 그런데 이러한 무의식이 과연 언어로써 온전히 표현될 수 있는가? 이에 대한 답은 정신분석학자들이 주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무의식이라는 기의(signifié)는 언어라는 기표(sinifiant)로 표현됨으로써 유의식으로 치환되며, 무의식이라는 그 본질이 퇴색된다. 따라서 그것은 언어의 영역으로 도달 불가능한 영역으로 보인다. 무의식의 유의식으로의 번역은 미끄러지는 기의와 기표의 차연의 향연일 것이다. 따라서 언어가 인간의 감옥이듯이, 유의식의 언어로 번역된 무의식이란 결국 유의식의 영역에 속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무의식을 보여주기 위해선 무의식의 언어를 사용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초현실주의자는 유의식적인 방법을 통해서 그 무의식을 표현했다. 그리고 그가 본 현상이 과연 무의식이라고 단언할 수 있을까? 과연 그 찰나의 순간의 현상을 머릿속에 카메라처럼 찍어놓고 그 모습을 온전히 캔버스에 담은 것일까? 무의식이라는 작은 씨앗이 의식적인 상상력과 만나서 초현실주의라는 유의식적 나무가 된 것은 아닐까?

루치오 폰타나(Lucio Fontana,1899-1968) - <Collezione Privata – Concetto Spaziale, Attesa>(1966)

무의식이란 유의식으로 치환될 수 없는 상이한 영역이다. 그런데 과연 무의식이라는 형상을 유의식이라는 질료로 온전히 표현하는 것이 가능할까? 오히려 루치오 폰타나 혹은 바넷 뉴먼의 추상회화가 나는 더 무의식을 잘 전달하는 것 같다. 아담의 언어를 바벨의 언어로 온전히 번역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우린 타락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순수함을 잃은 어른이 다시 어린아이가 될 수 없듯이, 우린 어른의 언어로 아이의 말을 이해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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