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찌그러진 형상

une figure déformée.

by 오경수
파블로 피카소(Pablo Picasso,1881-1973) - <아비뇽의 여인들>(1907)

모더니즘 이후 그림이 재현하는 바는 과연 무엇일까? 화가가 바라본 현상? 혹은 무의식과 환상 사이? 피카소가 그린 환락가의 여인들에게서 우린 그 화려함이나 매혹적임을 전혀 느낄 수 없으며, 미(美)보단 추(醜)를 찾아보기가 더 쉽다. 예술이 꼭 미를 추구해야 한다? 그것이 구시대적 담론임은 부정할 수 없다. 그렇다면 왜 사람들은 추해져 버린 예술을 근대 이후에도 영위하는가. 심지어 왜 그것을 갈구하는가.

회화에 절대적 진리라는 게 가능할까? 하이데거는 예술작품이란 "존재자의 진리가 자신을 작품 속에 정립하는 것이며, 여기서 진리는 재귀대명사의 사용을 통해 자신을 정립하는 주체가 된다"라고 말한다(진중권, 2003, 82). 반면에 미술사학자 곰브리치는 “어떤 그림도 말로써 완전하게 ‘설명’될 수 없다. 그러나 말은 때때로 편리한 지침이 될 수 있고 오해를 없애주며 적어도 미술가가 어떤 상황에 처해 있는지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게 한다”라고 한다(곰브리치, 2019, 576).

20세기의 위대한 어느 철학자는 예술작품이 자기 자신에게 말을 걸어서 고흐의 구두가 농촌의 한 존재의 소유임을 알려줬다고 하는데, 교과서에 가까운 미술사 책을 쓴 미술사학자는 진리란 닿을 수 없고, 오직 짐작만 가능하다고 말한다. 그리고 데리다는 예술작품은 “해석학적 대상”이 아니라 “개념화될 수 없는 것의 보존”이라고 단언하며, 작품이 절대적 해석으로 완전히 간파되지 않는 대상임을 암시한다.

조르주 브라크(Georges Braque,1882-1963) - <에스타크의 집>(1908)

그런데 재미있게도 저 찌그러져 보이는 그림들을 그린 화가들은 평면에 3차원 대상을 우리가 바라보는 시각이라는 평면으로 치환하지 않고, 3차원 자체를 2차원 평면 위에 온전히 옮겼다고 한다. 그것이 입체주의(Cubism)이다.

이탈리아에서 르네상스가 시작된 후 약 500년간 미술가는 수학적 또는 과학적인 원근법에 인도되었다. 그것에 의해 미술가는 단 하나의 고정된 시점(viewpoint)으로 대상을 보았다. 그런데 피카소는 마치 대상을 180도 돌아가면서 관찰한 것처럼 여러 시점에서 바라본 대상에 대한 인상을 하나의 이미지로 종합했다. 전통적 원근법을 단절한 이 기법은 그 후 몇 년 동안 현대 비평가들이 ‘동시적 시각(simulataneous vision)’이라 부르는 것으로, 한 인물이나 대상에 대한 여러 가지 모습을 단일한 이미지로 융해하는 결과를 낳았다. (스탠고스, 2014, 76-8)

그렇다면 저 찌그러진 창부의 초상화와 지진이라도 일어나서 쓰러진 것 같아 보이는 에스타크의 모습은 단순히 현상이 깨져버린 혹은 환상이 아니라 3차원의 진리를 2차원의 언어로 표현한 것이다. 아담의 언어를 바벨의 언어로 번역하려 했기에 그 대가로 미를 잃고 추를 선고받은 것일까? 존재의 단편적인 모습이 아니라 온전한 그 존재 자체를 담으려 한 입체주의 사조의 작품은 정말 3차원의 진리를 평면의 언어로 구사한 진리의 증인일까?

후안 그리스_포도 1913.jpg 후안 그리스(Juan gris,1887-1927) - <grapes>(1913)

찌그러진 형상 속에서 우린 무엇을 볼 수 있으며, 무엇을 바랄 수 있을까? '추'라는 요소가 '미'를 추월한 현대 미술에서 우린 '미'를 느낄 수 없다. 그렇다면 왜 추한 예술을 아직까지도 영위하며, 그 생명은 끊기지 않는가? 그 답은 '미'라는 아폴론과 공존하는 디오니소스가 '추'가 아니라 '숭고'이기 때문이다.


Reference

E.H. 곰브리치, 『서양미술사』, 백승길 · 이종숭 역, 예경, 2019.

니코스 스탠고스, 『현대미술의 개념』, 성완경, 김안례 역, 문예출판사, 2014.

진중권, 『현대미학 강의』, 아트북스,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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