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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유하는 객관

floating object

by 오경수
클로드 모네(Claude Monet,1840~1926) - <루앙대성당>(1894)

객관적이며 절대적인 것. 그런 게 과연 이 현상계 혹은 감각계에 존재할까? 모네의 회화는 한 시점이 아니라 여러 시점에서 보이는 성당의 모습을 담고 있는데, 모두 다르지만 모두 다 그 모습이 맞다. 현상계라는 감각적인 세계 특히 가시광선이라는 빛의 반사로 인해 시각적인 지각을 통해서 물체를 인식하는 현존재에게 이러한 순간은 때론 무엇이 진실인지 사유하게 되는 성찰의 순간을 선사한다. 분명 모두 다 원본이다. 붉은 조명 아래에 있을 때 그것은 붉게 보이고, 파란 조명 아래에서는 파랗게 보인다. 하지만 차이라는 서로 같지 않음으로 각 개체와 순간을 구분하는 현존재에게 다름이 존재하는 두 가지가 모두 같은 물체라는 것은 논리적으로 어긋난 것처럼 보인다. 흔히 말하는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라는 말이 이럴 때 쓰는 것일까?

절대적 색채를 가지는 것은 없다. 말레비치라고 사각형을 무조건 검은색으로만 그리지는 않는다. 사람의 피부색이 무조건 살구색이나 흰색이라고 단언할 근거가 우리에겐 없다. 나에게 살구색으로 보이는 것이 누군가에겐 다른 색상으로 보이고 있는지 어떻게 아는가. 우리에겐 서로 다른 감각질이 있는데, 우린 그것을 공유하거나 공적 언어로 표현할 수 없다. 오직 사적 언어만으로 그것에 대한 발화가 가능한데, 그것은 사적인 언어이기에 타자가 온전히 이해할 수는 없다. 내가 파란색이라 인식하는 것이 그녀는 빨간색으로 볼 수 있다. 그래서 우린 같은 색상을 보고도 다른 느낌을 받는다. 분명 우린 각자의 손가락으로 같은 색상의 스카프를 가리켰다. 하지만 A색이라 불리는 그것을 나의 감각질은 파란색이라는 기성 색상으로 인식하고, 그녀의 감각질은 빨간색이라는 기성 색상으로 인식했다고 치자. 이때 우리가 느끼는 미감은 온전히 다를 것이다. 그리고 왜 자기가 그렇게 느꼈는지 나름 논리적, 감성적으로 발언을 할 것이다. 하지만 끝내 우린 온전한 기표와 기의의 일치에 도달하지 못하고, 차이에 대한 이해와 인정으로 이 인식 투쟁을 흐지부지 끝낼 것이다.

앙리 마티스(Henri Matisse, 1869-1954) -<모자를 쓴 여인>(1905)

과연 내가 보고 있는 이 세상 그러니까 빛에 반사되어 보이는 시각적 현상이 남들이 보는 것과 온전히 일치할까? 때론 내가 보는 형상이 남들이 보는 것과 색상 반전이 된 것은 아닐까 하는 웃긴 상상을 한다. 나는 이 웃긴 상상을 해결할 수 없다. 왜냐하면 나는 나의 감각질로만 세상을 인식하고, 그들도 각자의 감각질로 세상을 인식하기에. 우린 하나가 아닌 각자이기에 온전한 기의의 일치를 기대할 수 없다. 동시에 나는 그의 감각을 채점할 수 없기에 객관적인 판단이 아니라 주관적인 이해와 배려로 그를 존중한다.

색상만이 그런 것이 아니다. 세계를 떠도는 담론 또한 그러한 객관에 닿지 못한 주관적인 부유물이다. 오직 전지전능한 일자만이 그것에 대한 진리를 알 텐데, 아쉽게도 그러한 신이 있는지는 현존재가 감히 알 수 없다. 정치적인 언론과 세간을 떠도는 온갖 가십과 담론은 하나의 증언의 형태로 나에게 전달된다. 그러한 증언을 전달해 주는 증언자는 나의 감각기관일 것이고, 나의 주관적인 가치관과 사유 등은 나의 감각질이 되어 머릿속에서 판단이라는 작용을 일으킬 것이다. 예술에 대한 판단, 뉴스에 대한 정치적 견해, 누군가에 대한 험담과 뒷담화 등 우린 많은 침묵과 떠도는 언표들을 잡아다 판단이라는 것을 하는데, 이 행위는 결코 객관적일 수 없다. 또는 절대적일 수 없다. 그것은 정치적 장의 실현이자 역사적 아프리오리의 결과물일 수밖에 없다. 그것이 그것인 이유는 그것이 그것이라고 나의 인식 전에 선행되었기 때문이다.

세잔_사과바구니가 있는 정물.jpg 폴 세잔(Paul Cezanne,1839~1906) - <사과바구니가 있는 정물>(1895)

기표없는 기의란 없다. 어느 경험주의 철학자가 존재하는 것들의 존재 이유를 타자의 지각에서 찾듯이, 기표를 통해서 우린 그 기의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으며, 기의를 전달하기 위해서 어떤 형태의 언어라는 기표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러한 기표와 기의의 객관적 일치란 불가능하다. 세잔이 그린 사과와 다 빈치가 그린 사과가 다르듯이, 우리의 이성은 같은 기표의 발화를 목격하더라도 서로 다른 기의를 연상시키기 때문이다. 내가 생각하는 것과 당신이 생각하는 것. 그것은 기표만 일치할 뿐, 각자의 기의란 서로 만날 수 없는 기찻길과도 같다.

이러한 대치는 일종의 번역이다. 프랑스어와 영어의 대치처럼 현존재의 사적 언어 사이의 대치다! 우린 서로 같은 기표를 통해서 소통가능한 대화를 실현하지만, 결국 그러한 대화란 기표를 통한 해석에 불과할 뿐, 그가 발화하고자 한 온전하고, 절대적인 기의에는 도달할 수 없다.

따라서 절대적인 객관이란 미셸 푸코가 말하는 선험적 아프리오리(a priori)를 제외하고는 불가능하다. 인간(homme) 자체를 초월한 아프리오리란게 가능할까? 우리가 객관이라 믿고, 절대적이라고 신봉하는 것들은 흔들리지 않고 부유하는 지각(地殼)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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