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prematism
말레비치의 회화에서 우리가 감각적으로 느낄 수 있는 것은 없다. 형상을 모두 지워냄으로써 우리의 오성은 제 할 일을 하지 못하며, 미(美)를 찾기란 힘들다. 절대주의(Suprematism)라는 이름처럼 회화를 절대적 극한으로 보내버린 저 그림에서 우리는 감각적인 즐거움을 느낄 수가 없다. 구상화라는 즉자적 회화의 존재 방식은 우리에게 쉽게 자신의 정체성을 드러냄으로써, 우린 프레임 안에서 아는 것을 재확인하고 거기서 즐거움을 느낀다. 하지만 절대주의, 추상 표현주의, 신지학 등 여러 요소들이 회화에 접목되면 우린 그러한 즐거움을 느끼지 못한다. 마치 세계에 딛지 않은 대지와도 같다. 배경 지식 없이 낯선 이방인과도 같은 작품은 우리에게 아무 말도 건네지 않는다. 그저 침묵하며 나를 시험할 뿐.
하지만 말레비치의 회화는 내게 거짓을 보여주지 않는다. 말레비치는 직설적인 작품명을 통해서 제목이라는 기표와 작품이라는 기의를 일치시킨 몇 안 되는 작가 중에 하나다. 검은 사각형, 검은 원, 검은 십자가 등 그는 논리적으로 당연한 사실들 어쩌면 진리를 회화를 통해서 드러낸다. 회화에서 감각적인 것을 모두 벗겨내어, 더 이상 회화는 우리의 혼탁한 정신을 속이지 않게 된다.
절대주의. 회화를 극한까지 치닫게 한 이 사조는 어쩌면 회화에서 절대적인 것을 제외하고 모든 것을 배제시킨 혁명이다. 현학적인 제목이 붙지 않은 회화의 이름 그리고 그 제목과 일치하는 회화의 구상은 더 간소화될 수 없다. 그런 면에서 말레비치의 절대주의는 회화의 끝이다.
검은 사각형 안에서 찾을 수 있는 것은 어둠뿐이다. 아니, 저 평면 속에 과연 어둠이 있을까? 그저 무(néant)는 아닐까? 아무것도 없는 저 화폭에서 우린 아무것도 찾을 수 없다. "과거의 예술이 유한한 대상의 미를 재현하려 했다면, 현대 예술은 무한한 대상의 숭고를 현시하려 한다. 현대 예술은 형상을 지움으로써 이 세상에 말할 수 없는 것, 볼 수 없는 것, 떠올릴 수 없는 것, 그릴 수 없는 것, 한마디로 형상화할 수 없는 것이 있음을 증언한다는 것이다. 오늘날 예술은 미가 아니라 숭고를 추구한다. 이를 위해 화면은 점점 아름다운 대상들을 게워내고 그 극한에서 마침내 텅 빈 공간이 되어버리는 것이다(진중권, 2022b, 220)."
묘사를 포기함으로써 현대예술은 이 세상에 묘사할 수 없는 것이 존재함을 증언한다(진중권, 2003, 243). 그런 면에서 아름다움이 아니라 숭고를 추구하는 현대미술은 Doxa가 아닌 Episteme에 가까워진다. 감각적인 것은 모두 지워냄으로써 우린 감각적 묘사를 통해서 전할 수 없는 무언가를 표현함을 감각을 포기함으로써 드러낸다. 감각의 축제가 끝난 그 자리는 가지계의 새로운 제국이 열리는데, 더 이상 즉물적이고, 즉자적인 형이하학적 인식이 아니라 사유를 통한 형이상학적인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무언가가 나에게 다가온다.
그것은 어쩌면 이데아를 경험하는 것일까? 감각으로 느낄 수 없는 그 절대 세계를 가는 문이 절대주의 회화일까? 회화라는 감각적 매체를 통해서 가지적 세계로 넘어가는 것은 모순이니 이 회화는 문이 아니라 열쇠정도일 것이다. 이 회화는 나를 이데아로 보내주지 않는다. 다만 내가 감각할 수 없는 이데아가 있음을 증언할 뿐. 그렇다면 열쇠도 아닐 것이다. 절대주의 작품은 가지계의 증인이며, 예술가는 그 발언자의 변호인 혹은 영매일 것이다.
그럼에도 말레비치는 감각계로 인식할 수 있는 제목을 통해서 그 증언을 감추었다. 은유적으로 드러냄으로써 아무나 알지 못하게 그는 가지계에 대한 증언을 남겼다. 말레비치의 회화는 감히 의심할 수 없다. 그 이유는 너무나도 직설적이고, 논리적으로 어긋나지 않는 기표와 기의의 향연으로 빈틈을 드러내지 않기 때문이다. 동시에 감각계의 인식 방식으로 어떻게 가지계를 의심하겠는가. 의심을 하기에 애초에 사용하는 언어가 다르기에, 그것은 불가능하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 그것은 실존할까? 실존한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감각적으로 느껴졌기에 그저 감각의 기만에 불과할 것이고, 없다고 말하기엔 그것은 감각으로 확인할 수 없다. 그것은 불가지의 영역. 신의 영역인 것일까?
진중권, 『현대미학 강의』, 아트북스, 2003.
_____, 『미학 오디세이3』, 휴머니스트, 20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