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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히터의 시니피에

signifié de Richter

by 오경수
게르하르트 리히터(Gerhard Richter,1932~) - <S with child>(1995)

리히터의 회화에서 우린 무엇을 알 수 있을까? 본질을 꿰뚫을 수 없는 그의 작품에서 우린 칸트가 말하는 오성과 상상력의 합일인 아름다움을 느끼기 어렵다. 그의 예술작품에서 기표(sinifiant)란 기의(signifié)라는 대지에 뿌리내리지 못하고 멘틀 위에 떠있는 지각과도 같이 부유한다. 그의 구상 회화에서 우린 분명히 어떤 형상을 느낄 수 있을 것만 같다. 하지만 작가는 블러링(blurring) 기법을 통해서 피사체의 확정성을 지움으로써 그의 예술은 끝없는 차연(différance)의 향연이 이루어지는 장(field)이 된다.

아이를 안고 있는 저 여인은 과연 누구일까. 자신이 잉태한 존재라서 사랑으로 감싸 안고 있는 것일까? 아님 버려진 남의 아이를 거두는 숭고한 연민일까. 회화적 요소와 그를 감싸는 작품의 이름과 담론은 이 그림에 대해서 아무 말도 해주지 않음으로써 이미지라는 시니피앙은 본질이라는 '시니피에'에 뿌리를 내릴 수 없게 된다. 사실 여성이 안고 있는 존재가 빨간 천에 감싸진 아이라는 생각 또한 억측일지도 모른다. 저 화폭에서 우린 추측만이 가능할 뿐 확정적 단언을 자신 있게 내릴 수 없다. 구상화라는 닫힌 예술 세계에서 리히터는 열린 작품 혹은 비확정적 해석을 통해서 유한 속에서 무한을 부여한다.

리히터 또한 그의 작품이 닫힌 세계가 아님을 언급함으로써 그의 작품은 우리가 감각으로 간파할 수 없는 형이상학적 평면임은 분명하다. 뭔가 보이지만 우린 그것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 수 없다. 뭔가 존재하지만 그것이 존재한다고 확언할 수 없다.

게르하르트 리히터(Gerhard Richter,1932~) - <September>(2005)

단면화에 꼭 구상을 담아야 할까. 이 물음은 몇 천년 이상 지속되어 온 미술의 본질을 완전히 뒤집는다. 그림이 무언가를 남기는 것은 맞는데, 꼭 그것이 말로 표현할 수 있어야 하고, 이성으로 느낄 수 있어야만 할까?

본질이 없는 저 회화 속에서 얻을 수 있는 정념이나 감정에 대한 답은 없다. 그냥 내가 생각하고 느끼는 바가 나에게 답이며, 그것이 내 세계의 진리다. 무(Néant) 위에서 부유하는 기표에 확정적 의미란 없다. 귀에 걸면 귀걸이고, 코에 걸면 코걸이일 뿐. 여름에 파란색이 시원해 보이고, 선거철에 특정 당을 연상시키듯이. 누군가는 파란색에서 차가움과 냉정함을 느끼고, 누군가는 파란색에서 슬픔과 미완성을 느끼듯이.

게르하르트 리히터(Gerhard Richter,1932~) - <Stripe>(2013)

밀대로 물감을 민 저 그림 또한 아무런 고정적 의미를 가지지 않는다. 뻗어나가는 광선의 일부를 보듯이 저 회화에서 색상은 멈춰있지 않고 옆으로 통과하는 것처럼 보인다. 리히터의 회화에서 본질의 차연. 그것을 가장 잘 나타내는 것이 저 Stripe가 아닐까? 차연이라는 속성과 구조라는 배치 속에서 해방된 이 예술은 현대인이 이해하기에 너무나도 현대적이거나 미래적이다. 미학이라는 담론과 예술이라는 분야로 과연 이 작가의 작품세계를 담을 수 있을까 의문이 든다.

게르하르트 리히터(Gerhard Richter,1932~) - <Reader>(1994)

그렇다고 리히터가 알 수 없는 것만 그리는 것은 아니더라. 칸트가 말하는 예술에서의 천재, 하이데거가 말하는 미학적 영매인 리히터는 그의 독특한 추상화뿐만 아니라 구상화 또한 훌륭하게 해낸다. 이게 과연 같은 작가의 작품이 맞나 싶을 정도로 완전히 다른 예술 언어로 이를 표현했으며, 그 미학적 전환은 불완전성을 드러내지 않고, 온전히 그 만의 장르적 shift를 이루어 낸다. 진중권 선생님은 『서양미술사 : 후기 모더니즘과 포스트 모더니즘』에서 리히터를 카멜레온에 비유하던데, 카멜레온이라는 언어로 그를 표현하기에 그 기표는 너무나도 협소한 것 같다. 대체 이 화가를 담을 수 있는 언어란 무엇일까? 너무나도 포스트 모던한 이 작가의 의미 작용 흐리기는 포스트 모던이란 키워드 말고 다른 단어로 형언하는 것이 가능한가 싶은 의문이 든다.

게르하르트 리히터(Gerhard Richter,1932~) - <180 Colors>(1971)

의미 작용의 연속이자 그로 판단하고 돌아가는 세상 속에서 리히터의 예술은 하나의 반항이자 정치적, 미학적 판단의 유보를 일으킨다. 동시에 경계허물기라는 해체를 통해서 사진과 회화의 경계를 무너뜨린 최초의 예술가들 중에서 한 사람이다. 구성과 추상 그리고 사진과 회화를 넘나드는 그의 예술 앞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말은 없다. 비트겐슈타인의 말처럼 우리는 말할 수 없는 것 앞에서 침묵해야 한다.

리히터의 작품이라는 시니피앙은 본질과 해석이라는 시니피에에 구속되지 않음으로써 무한한 차연의 향연이 이루어지는 장(field)이 되며, 동시에 비확정성 속에서 이성의 상상력을 발휘할 수 있는 현존재의 무의식과 의식의 헤테로토피아(hétérotopies)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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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이상학적 시선─보이지 않는 침묵과 형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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