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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에 대한 의지

La volonté de savoir

by 오경수
샤갈_나와 마을 1911.jpg 마르크 샤갈(Marc Chagall,1887~1985) - <나와 마을>(1911)

현대인은 모르는 것을 싫어한다. 우리 조직 내에 나만 모르는 비밀이 있다면 그것은 나를 타자로 만들고, 나만 모르는 투자비결은 나를 벼락거지로 만든다. 누군가의 카더라나 썰을 아느냐 모르느냐로 그와의 친분이 결정되기도 하기에 앎 혹은 지식이라는 것은 나의 권력과 존재감의 원천이다. 서열을 매기는 영장류의 종특때문에 인간에게 앎이란 특히나 중요하다. 그 지식의 목적이 무엇이든 혹은 어떤 종류인이지는 중요치 않다. 중요한 것은 인간이 끊임없이 지식을 추구한다는 것이다. 누군가는 학계에서 자신의 서열을 높이기 위해서, 누군가는 돈벌이를 위해서, 누군가는 심리적 안정을 위해서 그것을 알고 싶어 한다. 해저와 같은 미지의 영역이 인간에게 공포의 영역인 이유는 이러한 안정감을 주지 못하기 때문이다. 우린 그곳에 뭐가 있는지 모르며,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른다. 어쩌면 미지의 영역의 절정인 죽음에 우리를 도달하게 할 수도 있다.

그래서 인간은 탐구한다. 육체적 고통으로부터 자유롭기 위해서 의학을 발전시키고, 우리를 둘러싼 물질을 이해하기 위해서 물리학을 연구한다. 그리고 본질적으로 그 모든 것에 대한 학문인 철학을 한다. 철학을 통해서 현존재는 인간의 실존뿐만 아니라 예술, 도덕, 지식에 대한 학문을 함으로써 자신의 무지에 의한 불안을 종식시키려 한다.

앎을 추구한다는 것은 불안에 대한 해소이자 나의 지식의 장을 확장함으로써 이 세계에서 나의 존재감을 증대시키는 것이다. 모르기에 알고 싶다. 어쩌면 이 말은 그저 당연한 말이 아닐지도 모른다. 모르기에 알고 싶다는 '지식에 대한 의지'는 권력에 대한 욕망, 실존에 대한 안정 추구, 지식의 영역 확장으로 인한 즐거움, 불안의 종식 등 수많은 것들을 함의할지도 모른다.

더 이상 알고 싶은 것이 없다는 건 어떤 의미일까. 그건 애착이 떨어졌다는 것이다. 그것을 사랑하기에 그것의 모든 것들을 알고 싶어 하는 것인데, 그러한 행위가 더 이상 하고 싶지 않다면 그건 그에 대한 사랑이 식은 것이다. 의지박약과 의지상실은 다르다. 의지가 박약한 사람은 망상 속에서 의지를 활활태우며 공상에 빠져서라도 그 의지를 실현시키고자 한다. 그러나 의지가 없다면 그건 더 이상 그에게 그 대상에 대한 사랑이 없다는 것이다. 마음이 뜬 연인에게 받는 모든 것이 당연한 것이자 권리처럼 느껴지듯이. 알고 싶다는 것. 그것은 내 의지가 살아있다는 것이며, 내 욕구라는 연료를 활활 태울 수 있는 엔진이다.

공부하기 싫은 중학생에게도 알고 싶은 것은 있다. 같은 반 여자아이 아니면 어느 게임에서 어느 경지에 이른다면 어떤지 그는 궁금해한다. 그 궁금증을 원천으로 그는 여자아이에게 말을 걸기도 하고, 게임이라는 가상현실에 몰입해 자신의 입지를 세우려 한다.

르네 마그리트(René Magritte,1889~1967) - <금지된 재현>(1937)

그대는 어느 분야에서 무엇을 알고 싶은가. 그것이 그대의 욕망이자 꿈이다. 이성에 대한 성적 호기심, 예술에 대한 허영, 투자로 퇴사하는 방법, 행복에 대한 갈망, 지식에 대한 의지. 이 모든 것은 나의 방향성이자, 나의 무의식이 투영된 나의 뒷모습이다. 어쩌면 내가 공부하는 것과 내가 그것을 탐구하는 이유가 위의 그림처럼 나 자신을 온전히 타자의 입장에서 바라보는 메타인지일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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