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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과 상품의 차이

Difference between artwork and product

by 오경수
앤디 워홀(Andy Warhol, 1928-87) - <Campbell'S Soup>(1962)

작품은 사물이다. 어찌 보면 자명한 것으로 보이는 앞의 명제는 현대 이전의 미술에 진리와도 같은 것이었다. 개념 자체는 그 감각할 수 없기에 예술의 산물로 보기 어려웠다. 그래서 모든 작품은 물질성이라는 즉자적 존재 방식을 취해야만 했다. 만질 수 있는 혹은 한 공간에 같이 존재할 수 있는 사물이라는 것이 현대 이전에 암묵적으로 함의된 예술 작품의 진리였다. 따라서 모든 작품은 아우라(Aura)를 가졌었다. 아우라는 “아무리 가까이 있더라도 어떤 먼 것의 일회적 나타남”이다. 원작을 감싸고 있는 영기를 가리키는데, 벤야민은 이를 "자연대상의 분위기"에 비유한다(진중권, 2003, 43). 작품의 아우라는 그것의 고유성에서 비롯된다. 우리는 비범한 누군가를 만나거나, 평소와 다르게 압도적인 크기 혹은 강도의 무언가를 맞이할 때 아우라를 느낀다. 예술 작품의 아우라. 그것은 예술 작품의 일회성과 고유성에서 비롯되는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감정이다.

과거 초상화란 그 사람을 기억하기 위한 방법이었다. 망막에 맺히는 상(phenomenon) 혹은 그의 모습을 이젤 위의 캔버스에 옮겨 놓음으로써 그는 늙거나 죽어도, 그 모습 그대로 회화 속에서 존재할 수 있다. 그래서 부자들이나 권력자들은 자신의 위용을 후대에도 남기기 위해서 자신의 초상화를 의뢰했고, 그 모습은 망막에 맺히는 상 그 자체가 아니었기에 의뢰인의 이상이 가미된 하나의 이상적이고, 욕망이 섞인 편집된 모습이었다. 따라서 초상화는 피사체의 아름다운 모습을 부각하고, 그의 단점은 숨겨진다.

초상화 작업이 길고, 고되기에 그 값은 고가였으며, 아무나 접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었다. 그래서 초상화란 아우라를 듬뿍 뒤집어쓴 비범한 작품 혹은 사물이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러한 예술 작품과 한 공간에 존재할 경우, 같이 있어도 매우 먼 대상으로 여겼다. 그것은 귀중하며, 염원의 대상이었다.


하지만 사진의 등장으로 이 게임의 판도는 뒤집힌다. 사진의 등장으로 누군가의 외모는 장시간의 고된 노동과 이상화 작업을 거치지 않고 셔터 한 번으로 있는 그대로 담기게 되었다. 이때 망막에 맺힌 현상을 지류 위에 옮겨 놓은 무언가의 아우라가 벗겨진다. 대단하게 노력해서 단 하나만 얻을 수 있는 대상이 이제는 셔터 한번 누르면 여러 개로 무한 증식이 가능해진다.

우리는 돈을 소중히 여긴다. 그건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의 이데올로기가 자본주의이며, 에피스테메가 자본이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그렇다면 왜 우리는 그것들을 소중히 여기는가? 이 세계에 돈은 계속해서 흐르고, 넘쳐나는데. 그건 돈을 버는 것이 어렵기 때문이다. 돈이 많은 누군가에게 1억은 그냥 홧김에 쓸 수 있는 금액이지만, 서민에게 1억은 매우 큰돈이다. 그래서 그 금액이 주는 아우라가 다르다. 하지만 서민이 돈을 더 쉽게 많이 번다는 그 가치관은 달라질 것이다. 과거에는 너무나도 큰 가치였던 그 금액이 이제는 크게 여겨지지 않고, 그저 당연히 있는 가치로 여겨질 수 있다.

인플레이션으로 화폐의 가치가 떨어지듯이, 사진의 등장으로 이미지는 쇄도했으며, 이미지가 가지는 아우라란 약해지다 못해 결국 파괴되었다. 이때 미술은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화폭에 담는 자신의 본연의 의무를 잃게 된다. 미술은 현학적으로 변화했으며. 있는 그대로가 아니라 본모습을 추측할 수 없는 해체된 형상을 띄게 되었다.


카메라의 등장이 미술의 한 가지 의무―있는 그대로 혹은 보이는 그대로―를 해방시켰다. 이는 미술의 추상화라는 한 가지 새로운 가능성을 열었다. 따라서 예술의 과제는 더 이상 자연을 정확히 재현하는 게 아니다. 문제는 색조의 아름다움을 창조하기 위해 화구통 속에 내용물을 어떻게 조합하느냐다(진중권, 2022, 40). 그리고 또 하나의 혁명이 미술을 또 다른 의무에서 해방시킨다.

1917년 어느 작가가 독립미술가협회전시회에 <샘>을 출품한다. 이 독립미술가협회는 뒤샹이 알렌스버그, 월터 팩 등과 함께 설립한 협회였다. 독립미술가협회는 특이하게 심사위원도 없고, 상도 없는 미술전으로, 전시회에 참여하고 싶은 사람은 소정의 수수료만 내면 작품을 전시할 수 있었다고 한다. 근데 이라는 작품은 출품을 거부당했다. 그 이유는 동네 철물점에서 파는 소변기에 서명만 하고 작품으로 제출했기 때문이다. 위의 사진이 그 작품인데, 작가의 이름이 '리차드 무트'이기 이기 때문에 'R.Mutt'라고 서명이 되어있다. 전시회가 진행되는 동안에 이 작품은 후미진 곳에 방치되어 있었으며, 심지어 커튼으로 가려져서 아무도 그게 작품 인지 몰랐다고 한다. 이후 독립미술가협회의 마르셀 뒤샹이라는 사람이 자신이 발간하는 다다이즘 잡지인 <The Blind Man>에 리차드 무트라는 무명의 작가의 <샘>을 옹호하는 아래의 글을 투고했다(오경수, 2024, 147) .


"분명히 어느 예술가라도 6달러를 내면 전람회에 참여할 수 있다. 머트 씨는 <샘>을 출품했다. 그런데 아무런 의논도 없이 그의 작품이 사라졌다. 머트 씨의 이 배척당한 이유는 과연 무엇일까.... 변기가 부도덕하지 않듯이 머트 씨의 작품 <샘>은 부도덕하지 않다. 배관수리 상점의 진열장에서 우리가 매일 보는 제품일 뿐이다. 머트 씨가 그것을 직접 만들었는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다. 그는 그것을 선택했다. 일상의 평범 한 사물이 실용적인 특성을 버리고 새로운 목적과 시각에 의해 오브제에 대한 새로운 생각으로 창조된 것이다."


리차드 무트는 사실 뒤샹의 가명이었다. 즉, 리차드 무트가 뒤샹이었던 것이다. 변기에 대한 미학적 변호와 재판은 뒤샹의 자작극에 의해서 일어난 해프닝이었다. 이후 <샘>은 미술계에 큰 획을 긋는 미학적인 작품으로 인정받게 된다.


카메라의 등장이 미술을 재현의 의무에서 해방시켰다면, 뒤샹의 해프닝은 예술가를 실행의 의무에서 해방시켰다. <샘>이라는 작품의 등장 이후로 아니, 저 소변기가 작품으로 인정받은 순간부터 더 이상 예술가에게 발상과 실행을 고독히 그가 해내야만 그의 예술작품이라는 관습이 구시대적 발상이 되었다. 이제 그가 만들지 않아도 그가 발상해 낸 것이면 혹은 그가 선택했다면 그것은 그의 예술작품이 되는 시대가 열린 것이다. 이것이 레디메이드(Ready-made)이다.

“레디메이드에서 작품은 제품으로 내려오고, 작가는 익명으로 사라지고, 영감은 선택과 명명으로 대체된다. 이처럼 뒤샹은 아우라를 철저히 파괴해 예술을 아예 비미학(A-aesthetics)의 상태로 가져간다. 뒤샹이 창조한 것은 ‘새로운 객체’가 아니다. 소변기는 공장에서 만들어졌다. 그가 창조한 것은 “새로운 관념”이다. 눈에 보이는 ‘변기’가 아니라 보이지 않는 이 ‘관념’이 그의 작품이다. 이로써 망막에 호소하는 회화가 해체된다. 뒤샹에 이르러 미술은 “망막적(retinal)”현상에서 “개념적(conceptual)” 작업으로 바뀐다. 바로 이것이 뒤샹이 20세기 미술에 일으킨 ‘개념적 혁명(conceptual revolution)’의 시작이었다. 변기를 작품으로 만들어주는 것은 물리적 속성이 아니라 해석적 관념이다. 이 ‘개념적 전회(conceptual turn)’을 통해 미술은 비로소 현대성(modernity)을 획득한다. 뒤샹 이후 미술은 그 어떤 흐름에 속하는 것이든—심지어 가장 회화적인 작품마저도—모두 개념적 성격을 띠게 된다(진중권, 2019, 172-3).”

이러한 발상과 실행의 분리는 예술가가 스스로 작품을 만들 의무를 지워버렸기에, 그의 조수들이 그의 작품을 만들고, 선생님의 이름으로 작품을 출품하게 된다. 심지어 조수가 한 명이 아니라 마치 생산 공장의 한 라인처럼 많은 인원이 그의 작품 생산에 동원된다. 이러한 공장형 아뜰리에는 현시대까지 지속되고 있으며, 대표적인 예술가로 무라카미 다카시(Murakami Takashi, 1962~), 앤디 워홀(Andy Warhol, 1928-87), 제프 쿤스(Jeff Koons, 1955~), 데미안 허스트(Damien Hirst, 1965~) 등이 있다.

공장형 아뜰리에의 도입으로 그들은 손짓 하나 없이 자신의 작품을 대량으로 생산해 낸다. 그들의 작품 생산성은 마치 공산품과 같다. 생산성뿐만 아니라 그들의 작품의 탈아우라는 그것이 공산품과 다름이 없음을 증명하는 것과도 같다.

공산품과 그들의 작품을 비교해 보면 둘 다 공장형 생산방식을 고수하고, 아뜰리에 혹은 기업의 수장의 손길이 닿지 않았음에도 그들의 이름을 부여받으며, 더 이상 아우라가 없는 즉자적 사물에 불과하다. 그럼에도 예술작품은 사물 중에서도 특별하게 취급받는다. 공산품과 생산방식에서 더 이상 차이가 없음에도 그들은 한 작가의 작품이라는 그룹에 귀속되며, 아무 쓸모가 없음에도 공산품보다 훨씬 비싼 가격에 거래된다.


이 둘의 차이를 가르는 결정적 이유는 바로 그들의 목적이다. 별 볼일 없는 사물 일지어도 그 즉자적 존재를 예술 작품과 전시라는 목적으로 포장한다면 그것은 그냥 사물이 아니다. "예술의 산물"이다. 반면 공산품은 같은 사물임에도 전시나 심미적 대상이라는 대자적 역할을 부여받지 않는다. 그것은 그저 손안의 도구(Zuhandensein)이며, 시선이 투과되는 투명한 도구에 불과하다. 공산품은 시선에 투과되는 투명한 수단에 불과하며, 작품은 시선에 투과되지 않는 불투명한 시선의 종착지인 목적이라는 것이다. 뒤샹 이후로 아름답지 않은 사물과 예술가가 손을 대지 않은 사물도 작품으로 탈바꿈될 수 있다. 따라서 공산품과 작품의 차이는 전적으로 예술가에게 달려있는 것이다. 이러한 정의에 따라서 예술가는 사기꾼이 될 수도 있으며, 예술이라는 영적인 무언가의 영매가 될 수도 있다. 그런 면에서 현대 미술은 종교적인 특성을 갖기도 한다. 믿으면 그것은 작품일 것이며, 그렇지 않다면 그저 하나의 사물에 불과할 것이다.


Reference

오경수, 『현대미술이 어려운 이유 - 현대미학과 그의 변명』, 퍼플, 2024.

진중권, 『현대미학 강의』, 아트북스, 2003.

_____, 『미학 스캔들』, 천년의 상상, 2019.

_____, 『미학 오디세이2』, 휴머니스트,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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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미술이 어려운 이유─현대미학과 그의 변명

형이상학적 시선─보이지 않는 침묵과 형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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