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eauty and meaning
모든 존재는 두 가지 본질의 교집합이자 부분집합이다. 그 두 가지 본질은 미(美)적인 것과 쓸모에 관한 것이다. 아름다움과 유용함이라는 단어로 치환 가능한 이 특성은 손 안의 존재(Zuhandensein)를 취하는 현존재(Dasein)에게 그 존재를 평가하는 척도가 되며, 때론 평가의 척도가 아니라 그 자체가 될 때도 많다. 도구라는 것은 무엇을 위한 수단이자, 시선의 종착지가 되지 않는 투명한 존재다. 우리는 망치로 못을 박을 때, 못이라는 목적에 시선을 두고 못질을 한다. 망치질이라는 운동은 못질을 위한 부가적인 행위이기에 그것은 오로지 본질에만 충실하면 된다. 공구의 투박함은 우리가 도구에 대하는 미학을 고스란히 드러내는 계기가 된다. 공구란 그저 잠시 사용하는 도구이며, 그 기능 이외의 역할을 하지 않기에 그것은 아름다울 필요가 없다. 하지만 반면에 아름다움 그 자체로 기능을 하는 사물도 있다. 피규어, 오브제, 인형 등은 도구존재로써의 기능을 하지 않는다. 그것은 그저 미적인 역할만 충실하면 된다. 그래서 이러한 사물은 생산될 때 도구로써의 기능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오로지 디자인만을 위해 생산된다. 그것은 시각적 아름다움 하나로 그 기능을 다 하기 때문이다. 그것이 그 기능을 다하기 위해서 굳이 현존재의 손에 잡힐 필요가 없으며, 그저 시선의 대상이 되기만 하면 그것은 그 본질에 충실한 것이다.
망치, 변기, 주사기 등은 인간이 필요한 순간에만 찾고, 그 쓸모를 다하면 안중에 없는 도구이다. 그것은 스마트폰, 옷, 지갑처럼 항상 지니는 물건이 아니라 못질을 하거나, 볼일을 보거나, 약물을 투약할 때만 쓰인다. 직업에 따라 빈도가 다르겠지만, 앞에서 언급한 세 가지는 스쳐가는 도구존재일 뿐이며, 그 기능에 이상이 없다면 시선의 종착점이 되지 않는 투명한 존재다. 우리는 망치질을 할 때 망치에 대한 미적인 판단을 하지 않고, 그 기능에 문제만 없어 보이면 바로 그 도구의 기능을 사용한다. 망치질 도중 부러지지 않는다면 그 망치는 인간 의식의 지향점이 되지 않는다. 변기도 마찬가지다. 그것 자체가 그 기능을 이용하는데 큰 불편함이나 불쾌감을 주지 않는다면 그것은 의식되지 않는 도구존재이며, 그 순간 그것에 대한 의식의 지향정도는 의자와도 같다. 주사기 또한 사용하는데 문제가 없다면 간호사의 업무가 끝나면 시선에서 바로 사라져 버리는 도구존재일 뿐이다.
앞에 나열한 사물들의 공통점은 순간적으로 접하는 사물이며, 우린 그 기능 외에 그 사물에 아무런 관심이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것의 외관에 신경 쓰는 것은 사치로 여겨진다. 평소에 잘 쓰지 않는 망치가 망가져서 새로 사는 경우가 아닌 이상 우린 그 망치를 굳이 더 아름다운 망치로 교체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 그 도구의 아름다움은 일상 속에서 느낄 수 없는 영역이며, 아주 흔하지 않은 특별한 경우에만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왜 굳이 망치가 아름다워야 하는가? 그것은 그저 그 기능만 잘 해낸다면 반영구적으로 사용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도구는 그저 자기의 할 일만 잘 해내면 된다. 더군다나 자주 사용하지 않는 공구라면 더더욱 미적 대상이 아니라 그저 도구로써의 기능존재일 뿐이다. 일상적 시선에 놓이지 않는 대상은 가끔 그 기능을 발휘할 때만 실존의 장에 들어오게 되며, 그것은 시선이 투과되는 투명한 사물인 도구존재이기에 그것의 아름다움은 사치의 영역에 편입된다.
병따개, 귀이개, 이쑤시개, 드라이버, 스패너 등은 그 기능만 다하면 될 뿐 우리는 그 존재에게서 아름다움을 기대하지 않는다.
반면에 아무 기능 없이 아름다움만이 그 본질인 존재가 있다. 간접등, 피규어, 오브제, 예술 작품 그리고 장식품 등이 이 영역에 속한다. 우리가 무언가를 소유하거나 사용하는 이유는 주로 그것을 필요로 해서 이며, 때로는 그것의 기능이 나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아도 구매를 한다. 간접등은 나에게 생산적인 환경을 제공하지 않으며, 피규어와 오브제는 자리만 차지하며, 가끔 먼지를 닦아줘야 하는 귀찮은 존재이며, 예술작품과 장식품 또한 마찬가지다. 그럼에도 우린 그것의 아름다움 혹은 그것이 주는 무드 때문에 이러한 것들을 구매한다. 이러한 사물들은 필요가 아니라 욕구에 의해서 내 주변에 존재하는 것들이다. 무드등은 내 방을 환하게 비치는 형광등보다 전등의 역할을 하지 못하지만, 그 무드등이 주는 감성을 나는 원하며, 그저 전시만 될 뿐인 피규어, 오브제 그리고 작품은 그것을 가짐으로써 느끼는 만족감을 위해서 소유된다. 이러한 것들은 그저 아름답기만 하면 그 존재의 본질과 기능을 충족한다. 이러한 미적 존재는 기능이 없다고 했지만, 사실 그 아름다움이 그것의 기능이자, 본질이다. 그저 심미적 안정감과 만족감 그리고 미학적 쾌를 준다면 그것은 미적 존재로써의 기능을 충실히 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미적 존재는 어느 상황에 필수적인 기능존재와 다르다. 그것은 어떤 상황에서든 실용적인 기능을 해내지 못하며, 자리만 차지한다. 그저 사치와 욕망의 대상일 뿐, 그것이 나에게 필수적으로 필요한 상황은 없으며, 그것 없이도 나는 잘 살 수 있다.
이러한 존재의 특징은 일단 비싸다. 예술작품은 나에게 생산적인 무언가가 아니며, 나는 그것을 통해서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없다. 그것은 그저 화폐처럼 존재할 뿐이다. 그 비싼 값에 비해서 그 본질적 가치는 적으며, 한 존재의 허영과 과시를 투영한 결정체일 뿐이다.
모든 존재는 미적인 요소 혹은 기능적인 측면을 갖춘다. 자본주의라는 이 거대한 소비시장에서 우리가 마주하는 상품은 대부분 이 두 가지 특성의 교집합에 해당하는 것이다. 기능만 추구해야 하는 제품이면 필요에 의해서만 구매가 이루어지기에 그곳에서 사치는 발생하기란 어려우며, 소비자는 배덕감을 느낄 상황이 거의 없다. 반면에 미적인 목적만을 추구하는 경우는 경제적인 상황과 양심이라는 만들어진 도덕에 의해서 지양되는 소비다. 그래서 기능에 의한 소비는 망설임 없이 이루어지며, 미적인 요소가 크게 개입되지 않는다. 그것은 시선의 대상이 아니라 눈앞에 투명한 도구일 뿐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미적존재에 대한 소비는 지갑사정과 공간 등의 문제로 많은 망설임이 이루어지며, 기능이 없기에 그 소비는 성사되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미적이면서 동시에 기능적인 사물에 대해선 그 소비의 원인이 동시다발적이다. 더 나은 성능 혹은 더 나은 디자인 아니면 부재에 의한 대체품의 필요 등이 공존하며, 나의 이성에 혼란을 준다. 정상적으로 기능하는 스마트폰을 굳이 바꾸고 싶게 만드며, 굳이 유튜브나 넷플릭스를 핸드폰이 아닌 태블릿으로 보고 싶게 나를 유혹한다. 그래서 현대인은 예쁜 쓰레기에 둘러싸여 있다. 필요와 사용빈도는 크게 중요치 않으나 그저 차이에 의한 욕구로 인하여 구매한 가성비 떨어지는 소비가 행해지며, 그 소비는 소비만으로 끝나지 않고 현타를 유발한다. 하지만 그 현타에도 불과하고 또 예쁜 쓰레기를 사는 악순환은 반복된다. 왜 이러한 악순환이 반복될까? 그건 예쁜 쓰레기가 가지는 일말의 기능성과 그로 인한 합리화 때문일 것이다. 광고와 차이 그리고 비교로 소비를 조장하는 사회에서 예쁜 쓰레기는 과연 피할 수 없는 존재일까? 우리는 어쩌면 자기를 잃고 시대라는 파도에 몸을 맡겼기 때문에 아무 생각 없이 또 예쁜 쓰레기를 사는 것일 수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