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현종 개인전, <편린—시간을 그리다>
과거의 흔적으로 부터
우리가 보고 느끼는 대상은 무엇 인가의 흔적이며
과거의 경험과 감정이 축적되고 융합된 결과물 이다. 흔적은 표식이다.
시간은 흔적을 남긴다 숨겨진 저마다의 이야기 아픔 슬픔 기쁨 행복 희망 등을 표현이다.
인간의 삶과 비슷함을 발견하게 된다. 삶의 모든 순간은 편린이고 지금의 우리들의 이야기다.
편린—시간을 그리다<작가노트>
조현종은 ‘편린(片鱗)’이라는 표제를 통해 시간의 흔적과 기억의 잔상을 회화적으로 호출한다. 작가노트가 말하듯, 우리가 보고 느끼는 대상은 언제나 어떤 과거로부터 남겨진 흔적이며, 과거의 경험과 감정이 축적되고 융합된 결과물이다. 따라서 그의 회화는 대상을 재현하는 그림이라기보다, 시간에 의해 남겨진 표식을 다시 표면 위에 드러내는 작업에 가깝다. 그는 낡은 표면에 남은 균열과 마모, 침식된 질감처럼 사라져 가는 흔적들을 화면 위에 겹겹이 축적하며, 이미지가 완결된 서사로 수렴하기보다 감각적 잔향으로 남도록 구성한다. 그 결과 화면은 “무엇을 말하는가”보다 “무엇이 남아 있는가”를 묻는 장치가 된다.
조현종의 작품은 매끈한 지본채색 회화와 달리, 평면임에도 특유의 붓터치와 마티에르로 인해 입체감을 강하게 발생시킨다. 나는 이 입체감은 대상을 사실적으로 모사하기 위한 깊이라기보다, 무언가의 단면을 노출시키는 깊이에 가깝다고 본다. 마치 어떤 사물이나 사건이 한때 그 자리를 이루고 있었으나 지금은 사라져버린 뒤, 그 자리에 남은 흔적만이 화면을 구성하는 듯 보이기 때문이다. 또한 이 마티에르의 거침을, 무언가를 드러내려는 의지와 사물성 자체로 회귀하려는 성질이 충돌하는 투쟁으로 보인다. 이 관점에서 조현종의 회화는 하나의 증언과 은폐가 동시에 이루어지는 장소이다.
그 증언과 은폐는 각각 무엇인가. 그것은 시간에 대한 것이다. 작품 혹은 화가는 지나간 시간에 대한 반추, 혹은 증언을 시도하지만, 망각이라는 은폐와 ‘이미 지나감’이라는 현실 속 부재가 그 시도를 방해한다. 그리고 바로 그 방해가 발생하는 지점에서—편린—회화는 생성된다. 즉, 조현종의 작업은 과거를 온전히 복원하는 재현이 아니라, 복원이 불가능하다는 사실 자체를 표면으로 남기는 방식의 증언으로 볼 수 있다. 따라서 그의 회화에서 증언은 기억을 소환하려는 표면의 축적으로 나타나고, 은폐는 그 소환이 끝내 완결되지 못하는 결손과 흐림으로 나타난다. 두 운동은 서로를 지우지 않고 동시에 성립하며, 그 긴장 속에서 화면의 밀도가 만들어진다.
특히 no.25-72는 색면의 경계가 비교적 뚜렷하게 느껴져, 화면이 지질학적 지층처럼 보인다. 이 지층적 감각은 조현종의 회화를 ‘시간의 축적’으로 읽게 만든다. 우리는 이미 지나가버린 시대의 흔적을 발견함으로써 과거를 인지하지만, 동시에 기억이라는 불확실한 수단을 통해 그 편린을 온전히 재현하지 못함을 자각하게 된다. 그래서 관객은 조현종의 캔버스에서 ‘아는 온전한 형상’을 찾는 데 실패한다. 그러나 그 실패는 감상의 결함이 아니라, 과거와 기억의 구조가 본래 지니는 결손을 반영한다.
망각해버린 순간은 혼탁한 회상일 뿐 구상화될 수 없다. 과거는 이미 지나갔으며, 현재는 찰나의 순간이다. 그리고 우리가 현재라고 말하는 그 편린은, 그것을 말하는 순간 이미 과거에 종속되어 더 이상 현재가 아니게 된다. 조현종의 회화는 바로 이 역설을 개념으로 설명하기보다, 표면의 층위와 경계, 침식된 흔적의 형식으로 제시한다. 결국 그의 추상은 형상의 부재가 아니라, 시간을 붙잡으려는 시도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형식적 귀결이다.
시간의 지층—상처, 긁힘과 같은 흔적—은 지나간 경험이며, 무언가의 형상인 듯 아무것도 아닌 듯한 모호한 잔여는 망각의 형태다. 조현종의 화면에서 재료는 단순한 매개가 아니라, 기억과 망각이 교차하는 물질적 사건이다. 한 번의 붓질은 드러냄(증언)으로 남고, 덧칠과 침식은 가림(은폐)으로 남는다. 그 과정에서 화면은 의미를 명확히 고정하기보다, 의미가 고정되지 못하는 상태를 지속시킨다. 즉, 그의 마티에르는 표현의 결과이면서 동시에 지워짐의 결과이고, 이중의 결과가 화면을 ‘시간의 표면’으로 만든다.
작품명이 넘버링으로 제시되는 방식은 시간의 익명성과 연결된다. 지나간 날은 기념할 사건이 부여되지 않으면 그저 날짜일 뿐이다. 대부분의 시간은 이름을 갖지 못한 채 지나가고, 이름 붙는 순간은 예외로 남는다. 넘버링은 바로 그 ‘이름 없는 시간’의 성질을 반영하면서, 동시에 해석을 특정 서사로 고정하지 않게 한다. 제목이 강요하는 의미의 방향 대신, “이것은 지나간 날들의 편린”이라는 최소한의 좌표만 남기며, 관객이 자신의 기억과 감정을 통해 화면의 층위를 발굴하도록 유도한다. 그러므로 넘버링은 제목의 부재가 아니라, 제목이 되지 못한 날들—대부분의 시간—을 존중하는 명명법에 가깝다.
조현종의 ‘편린’은 기억을 복원하는 회화가 아니라, 기억이 복원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표면으로 증언하는 회화다. 그의 화면에서 증언과 은폐는 서로를 부정하지 않고 동시에 작동하며, 그 긴장이 마티에르와 층위로 굳어진다. 관객은 작품 앞에서 의미를 단정하기보다, 남아 있는 표식들을 더듬으며 “무엇이 사라졌고 무엇이 남았는가”를 감각적으로 확인하게 된다. 이때 회화는 사건의 기록이 아니라, 사건이 기록될 수 없다는 조건 자체를 드러내는 장(field)이 된다.
따라서 조현종의 작품을 읽는 일은 특정한 메시지를 해독하는 일이 아니라, 시간의 표면을 발굴하는 일에 가깝다. 지층처럼 겹친 색과 마티에르의 단면을 따라가다 보면, 우리는 과거를 ‘재현된 이미지’로 소유하는 대신, 과거가 늘 결손과 혼탁함 속에서만 우리에게 도착한다는 사실을 마주하게 된다. 그리고 그 결손이야말로 삶의 구조와 닮아 있다. 삶의 모든 순간은 편린이고, 지금의 우리 또한 그 편린들의 축적이라면, 조현종의 회화는 결국 시간의 지층을 통해 인간의 삶을 되비추는 장치로 기능한다. 그의 화면은 “완결된 기억”이 아니라 “남겨진 흔적”을 보여주며, 그 흔적들 사이에서 우리가 현재라고 부르는 찰나가 얼마나 쉽게 과거로 침잠하는지를, 그리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계속해서 의미를 더듬을 수밖에 없음을 조용히 환기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