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진숙 작가─Queen of Khan

'칸'의 미학

by 오경수


현대인에게 빈칸, 앞 칸, 아래 칸, 휴지 한 칸 등 '칸'이라는 단어는 익숙한 단어다. 익숙한 단어이기에 이 단어를 접할 때 칸에 대한 고찰을 하는 과정을 거치지 않고, 칸에 대한 개념을 바로 떠올린다. 그러나 "칸의 회화"에서 조사 앞의 단어 '칸'이라는 단어가 너무나도 낯설게 느껴졌다. 대체 저 칸이라는 기표(signifié)는 어떤 기의(signifiant)를 함의하고 있을까? 나의 이성은 저 단어에 합치하는 '칸'의 개념을 찾기 위해 고군분투했으나, 그 실상은 일상에서 쓰는 "사방을 둘러막은 그 선의 안"을 의미하는 칸을 지칭했다. 원진숙 작가는 앞에서 언급한 칸(khan) 또는 "칸의 회화"라는 개념을 중심으로 작업한다. 그는 이것을 회화의 틀로 삼고 자신만의 조형 언어로 확장한다.

칸이라는 사각형을 질료로 작품을 형성하기에 그 작품 세계는 추상의 형태로 존재를 드러낸다. 작가가 조형 언어로서 추상을 골랐기에 작가의 설명 없이는 그 작품 안에서 작품이 내게 건네는 메시지를 듣기 어렵다. 하지만 나는 운 좋게도 원진숙 작가와 대면할 기회가 있어서 그의 작품 세계에 대한 설명을 들을 수 있었다.

청담동 갤러리 훈에서 원진숙 작가의 전시가 10월 14일부터 10월 31일까지 진행된다.

작품의 원천

예술가 자신의 머릿속에 있는 형상을 사물이라는 질료를 통해 실현시킨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미학이 보편적으로 익숙하기 때문일까? 사람들은 예술가가 주체(subject) 임을 부정하지 않으며 의심하지 않는다. 예술가라는 존재자가 자유의지를 가진 주체임은 괄호 속에 숨겨진 암묵적 진리다. 그래서 작품의 모든 요소가 그의 의도가 반영된 것이라 여긴다. 따라서 대중은 작가가 작품을 통해서 드러내고자 하는 바가 분명히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원진숙 작가는 그의 작품이 본인이 무언가를 드러내는 존재임을 부정한다. 그 작품 앞에서 붓을 들고 있는 것은 자신이 맞지만, 작품의 진리를 드러내는 것은 본인이 아니라 '그분'이며, 자신은 그리는 것일 뿐이라 말한다.¹ 따라서 그의 작품에서 이성의 의도뿐만 아니라 우린 우연성 또한 발견할 수 있는데, 작가는 이러한 우연마저도 창작의 일부로 인정하며, 작품으로 형성하며, 우연성의 과정에서 쾌를 느낀다.²

원진숙 작가는 좌절에 부딪혀서 힘들 때, 길에서 풀 한 포기를 발견했다고 한다. 도시인에게 인위적으로 꾸며진 자연이 아닌 곳에서 풀을 찾기란 힘든데, 작가는 그것을 우연히 길에서 발견했다. 우리에게 풀은 그저 흔한 존재이며, 칸이라는 단어처럼 의심의 여지없이 의식에 개념이 투영되는 존재이다. 하지만 원 작가는 이 풀을 대면했을 때 일상적 인식이 아닌 다른 특별한 인식의 경험을 하게 된다. 그 풀은 미학적으로 너무나도 완벽했다고 한다. 보통 풀을 마주친 인간에게 그것은 어느 목적을 위한 수단이거나 그저 지나치는 한 사물에 불과하다. 그래서 우린 풀에 크게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 그러나 원 작가는 그 미학적으로 완벽한 풀을 접함으로써 그 풀을 그저 지나치는 대상이 아니라 미학적 관조의 대상으로 인식하게 된다. 이때 그 풀의 완벽함은 오직 자연의 우연만으로는 불가능한 것임을 원 작가에게 자각시키고, 그 풀이 신이 존재한다는 증거였다고 작가는 말한다. 이러한 '미학적 완벽'을 실제로 접한 후 그의 작품에 그분은 늘 함께 하셨으며, 원 작가를 통해서 그림으로 드러났다.

원 작가는 오로지 그분에게만 작품활동을 맡긴 것은 아니다. 개인적인 노력과 연구 또한 함께 수반되었기에 그의 독창적인 작품세계가 형성된 것이다. 작품을 만드는 과정에 대해서 질문을 던지니 일상의 거의 모든 시간을 작품을 접하는데 할애했다고 한다. 모든 시간을 도서관이나 서점에서 미술서적만 탐독했으며, 사유하는 부분과 지향하는 바에 접점이 있는 예술작품을 탐구했다고 한다.

<The twinkle moment>(2025)

아름다움

원 작가의 작품은 움직이지 않고, 아무 소리도 내지 않는다. 그럼에도 우린 그 작품 속에서 시간성, 공간성 그리고 생명력을 느낄 수 있다. 원 작가의 작품은 대체로 캔버스 위에 단순히 그림을 그리는 방식이 아니라, 천을 사용하여 패치워크(patchwork) 방식으로 재구성된다. 천을 자르고 접고, 뒤틀고, 3차원적인 구조감을 주는 등 회화와 조각의 경계에 있는 형태를 보여준다. 특히 작품의 앞면뿐 아니라 이면까지 고려하고, 천을 말아 올리거나 겹치는 구조를 통해 심도 있는 공간감과 조형의 층위를 만들어낸다. 이러한 그의 작품은 바라보는 위치에 따라서 다르게 보이는 신비한 경험을 관람자에게 선사한다. 왼쪽에서 보았을 때와 오른쪽에서 보았을 때 다른 모습을 보이는 작품은 그 자체가 살아있는 것과 같다. 요즘 용어로 표현해서 관람자인 나와 밀당(?)을 하는 것 같다. 캔버스 위에 덫붙여진 천에 의해 어느 진실을 감추는 것과 같은 회화는 나에게 그의 목소리를 들려줄 듯 말 듯 함으로써 그 생명력을 내게 드러낸다. 그러한 유기적인 작품은 관람자가 단순히 일방적 시선으로 작품을 감상하는 것보다 작품과 닿을 듯 닿지 않는 소통이 일어나는 '장(field)'이다.

즉, 원 작가의 작품에서 드러나는 아름다움은 생명력이다. 작품은 유기적인 형태를 띰으로써 생명력을 통해 아름다움을 표출하며, 관람자는 그 작품 앞에 서서 작품과 소통을 시도함으로써 자신이 살아있는 존재임을 자각하고, 자신의 생명력을 느끼게 된다.

원진숙 작가는 생명력뿐만 아니라, 한국의 고유한 미(美) 또한 작품에 담았다. 크고 작은 천을 접어 중첩하여 박음질하거나 뚫어서 만들어낸 3차원의 네모칸 안에 한민족의 정체성을 표현했다. 천이라는 전통적 소재와 현대적인 표현력의 향연은 원 작가만의 작품세계를 형성하는 도구이며, 그 상호작용은 원 작가 작품의 개성이 된다.³

<영원한 사랑의 기쁨과 믿음>(2025)

주관적 감상평

원진숙 작가의 작품은 캔버스 아래 숨어있는 진리⁴를 내게 보여줄 듯 말 듯하는 매력이 있는데, 그러한 점이 하이데거의 미학을 연상시킨다. 따라서 원진숙 작가의 작품은 진리의 개방과 은폐의 투쟁이 일어나는 장소이다. 작품의 천 조각이 일어남과 누워있음은 그러한 특징의 물질적 상징이며, 그 틈에서는 아담과 이브가 선악과를 따먹기 전에 들을 수 있었던 신의 노래가 들려온다. 하지만 태초의 아담의 언어가 아닌 타락한 바벨의 언어로 소통하는 우리에게 그 진리란 해석할 수 없는 해석학적 순환을 유발한다. 결국 그 작품 앞에서 들려오는 신의 목소리 앞에서 나의 이성은 무(néant)를 경험하고, 그 목소리가 아닌 내가 생각하는 것에 대한 것을 직면한다. 따라서 결국 해석은 자기 자신으로 되돌아온다. 해석자는 해석의 주체이자 동시에 그림 안에 포획된 존재이며, 해석은 자신을 되비추는 순환의 거울이 된다.


작가의 사각형과 이 도형들의 향연은 마치 우리 사회를 보여주는 것 같다. 작가의 작품에서 하나의 사각형이 그 자체론 어떤 형상을 드러낼 수 없지만 여러 색상을 지닌 각각의 사각형이 만나서 형상을 이루는 것이 마치 사회의 형성을 보여주는 것과 같다. 전쟁, 정치적 갈등, 성적 혐오 등으로 개인들이 합일되지 못하는 현대사회에 치유의 희망을 던지는 것처럼 보인다.

작가는 여러 의미에서 대화의 단절과 상상력의 한계가 사회적 문제인 작금의 사태를 표현한 것은 아닐까? 영화계에 칸의 여왕으로 전도연이 있다면, 미술계에 칸의 여왕으로 원진숙이 있다고 말할 수 있으며, 언젠가 뮤지엄에서 그의 작품을 볼 수 있기를 희망한다.

<바다이불>(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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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나는 빛나는 별은 하늘에만 있는 줄 알았다. 그래서 평생 닿을 수 없으며, 그저 멀리서 바라보며, 대화할 수 없을 것이라 단언했다. 그러나 빛나는 별은 밤하늘에서만 볼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별은 가까이에도 찾을 수 있으며, 가까이 있으니 더 눈부시게 빛이 났다. 나는 그동안 미술을 글로만 배웠으며, 한국인임에도 한국 미술에 관심이 없던 것은 아닌가 하는 반성의 시간이 되었다.

미술이란 작가와 관람자의 소통이라고 볼 수 있는데, 나는 지나간 역사 속에서 그들의 업적만 보고서 죽은 자에게만 말을 건 것은 아닌가. 죽은 자는 말이 없기에 이제부터는 살아있는 동시대에 말을 걸어보고, 문을 두드려보고자 한다. 귀한 시간 내주시고, 좋은 말씀 해주신 원진숙 작가님과 김월수 평론가님께 감사인사를 드리며 이 글을 마치겠다.


따로 예약이 필요하지 않은 무료전시이며, 운 좋으면 작가님을 직접 뵐 수 있다.


Notes

1. 여기서 그분은 하느님을 말한다. 원진숙 작가의 종교는 천주교다. 원 작가에게 그림 그리는 것은 명상 혹은 기도이며 동시에 노동이다. 자신이 미학적 주체임을 부정하고, 영매와도 같이 그분의 통로임을 자처하는 설명이 예술가의 주체를 해체한 Martin Heidegger의 미학을 떠올리게 한다.

2. 작가가 자신의 작품 세계를 설명할 때 언급한 키워드로 카오스(chaos)가 있는데, 이는 단순히 무질서로서의 혼돈을 말하는 게 아니다. 그가 말한 카오스는 무질서라는 질서였다. 노자 철학과 카오스라는 철학 개념을 알기 전에는 자신의 카오스가 그저 혼돈의 무질서라고 생각하며, 그것을 개선해야 할 단점으로 보았지만, 인문학적으로 영감을 받은 후에는 그것이 혼돈과 무질서가 아니라 우연성이라는 단어로 탈바꿈되고, 체계화되었다.

3. 작가가 천이라는 소재를 작품의 재료로 고른 이유는 어렸을 때부터 가장 좋아하고, 익숙한 것이라고 원 작가에게 직접 들었다.

4. 여기서 진리는 객관적 일치로서 변하지 않는 사실이 아니라 존재자 그 자체가 드러나는 사건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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