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더니즘 속 두 가지 양태

Greenberg, C. 「Avant-Garde and Kitsch」

by 오경수
Andy Warhol(1928-1987) - 「Marilyn Monroe」(1967)

근대 문명은 하나의 사회 안에 서로 완전히 다른 두 가지 문화 형태를 동시에 낳았다. 한쪽에는 T. S. 엘리엇의 시와 피카소의 회화, 브라크의 실험 같은 고도로 지적인 예술이 있고, 다른 쪽에는 팝송과 잡지 표지, 할리우드 영화 같은 대중 예술이 있다. 클레멘트 그린버그는 이 두 문화의 공존이 단순한 취향의 차이나 계급적 구분이 아니라, 근대 사회의 구조적 모순을 드러내는 징후라고 보았다. 그는 전자가 아방가르드(avant-garde), 후자가 키치(kitsch)라고 명명하면서, 이 둘의 대비 속에서 예술의 본질적 위기를 읽어낸다.

그린버그에 따르면, 아방가르드는 전통의 붕괴 속에서 태어난 예술이다. 중세에는 종교와 전통이 예술가의 정체성을 보증해 주었지만, 근대에 들어 인간은 신의 질서로부터 분리되었고, 예술은 스스로의 존재 이유를 증명해야 하는 상황에 처했다. 사회가 예술을 정당화하지 못하게 되자, 예술은 외부 세계의 모방에서 벗어나 자신이 무엇인지, 즉 '예술 그 자체의 본질'을 탐구하기 시작했다. 그린버그에 따르면 "아방가르드 예술가란, 오직 자기 자신의 법칙에 의해서만 유효한 세계를 창조함으로써 신을 모방하려는 자이다."¹ 이 문장은 그린버그 미학의 근본 원리, 즉 '자기완결적 창조'를 가장 응축적으로 보여준다. 예술은 더 이상 외부 세계의 재현이 아니라, 창조 행위 자체가 목적이 되는 자율적 구조로 나아간다. 그리하여 세잔, 마티스, 몬드리안, 칸딘스키 같은 화가들은 세계를 재현하는 대신 회화라는 매체의 형식적 조건—선, 색, 평면, 구성—자체를 실험했다. 그들에게 예술은 더 이상 '무엇을 그리는가'가 아니라 '그림이란 무엇인가'를 묻는 행위가 되었다. 예술은 자기 자신을 성찰하고, 그 내부에서 의미를 창출하는 자기 지시적(self-referential) 체계로 발전했다. "자신의 존재를 정당화할 능력을 상실한 사회 속에서, 예술가는 내면으로 향한다. 그는 사회가 더 이상 제공할 수 없는 정당화를 예술 그 자체에서 찾는다."² 이는 예술의 '사회적 고립'이 단순한 도피가 아니라, 정당성의 이전임을 보여준다. 예술은 더 이상 사회의 가치에 기대지 않고, 자체의 윤리와 의미를 창조한다. 이것이 바로 '예술을 위한 예술(Art for Art's Sake)'이라는 슬로건이 지시하는 근대 예술의 정신이며, 그린버그가 말하는 '예술의 자율성(formal autonomy)'의 핵심이다.

Pablo Picasso(1881-1973) -「Les Demoiselles d’Avignon」(1907)

그러나 이러한 아방가르드의 정신은 동시에 사회로부터의 철저한 고립을 의미했다. 산업화된 자본주의 사회는 점점 더 많은 대중을 도시로 끌어들였고, 그들은 문해력을 얻었지만 교양을 잃었다. 대중은 예술을 이해할 지적 여유도, 미적 훈련도 없었고, 대신 즉각적인 쾌락과 감정을 원했다. 자본주의는 이 욕구를 정확히 포착했다. 그들은 진정한 예술 대신, 감정의 효과만을 모방한 모조품을 만들어내기 시작했다. 그린버그는 이것을 '키치(kitsch)'라고 부른다. 키치는 예술의 과정(process)을 버리고, 그 결과(effect)만을 복제한다. 진정한 예술이 탐구와 사유의 결과로써 감동을 만들어낸다면, 키치는 그 감동을 인위적으로, 즉각적으로 만들어낸다. 잡지의 삽화, 광고 이미지, 통속 소설, 감상적인 영화—이 모든 것이 키치의 예이다. 키치는 인간의 감정을 대신 느껴주며, 감동을 '소비 가능한 형태'로 만들어낸다. 그린버그는 이것을 '미리 소화된(pre-digested) 예술'이라 부른다. 대중은 더 이상 예술을 이해하거나 사유할 필요가 없다. 단지 소비하고 반응하면 된다. 예술은 하나의 감정 산업이 되었고, 감동은 상품이 되었다.

Ilya Repin(1844-1930) - 「Barge Haulers on the Volga」(1873)

그린버그는 피카소와 러시아 화가 레핀을 비교하면서 이 차이를 가장 명료하게 설명한다. 피카소의 회화는 관람자가 스스로 사유를 통해 의미를 구성해야 하지만, 레핀의 회화는 감정과 의미가 즉각적으로 주어진다. 피카소는 '원인'을 그리는 반면, 레핀은 '결과'를 그린다. 즉 피카소의 그림은 생각하게 만들고, 레핀의 그림은 생각하지 않아도 이해된다. 아방가르드는 예술의 과정을 모방하지만, 키치는 예술의 효과를 모방한다는 그의 유명한 문장이 바로 이 대조를 요약한다. 아방가르드는 정신적 긴장을 요구하고, 키치는 감정적 반응만을 요구한다. 전자는 예술의 진실을 추구하고, 후자는 감동의 환상을 판다. 그린버그는 다음과 같이 키치에 대해 기술한다. "키치는 기계적이며, 정해진 공식에 따라 작동한다. 키치는 대리적 경험이며, 가짜 감정이다. 그것은 겉모습은 바뀌어도 본질은 언제나 동일하다."³

그린버그에게 이 두 문화의 대비는 미학적 문제가 아니라 사회적 문제이기도 하다. 아방가르드는 부르주아의 후원 속에서만 살아남을 수 있었지만, 부르주아는 점점 예술을 이해하지 못하게 되었다. 그들은 더 이상 세잔이나 피카소의 예술을 감상할 능력을 갖추지 못했다. 반면 대중은 문해력을 얻었지만, 그것을 교양으로 전환하지 못했다. 결국 예술은 사회로부터 고립되고, 대중은 키치를 통해 '예술의 대체물'을 소비하게 된다. 자본주의 사회는 감정의 진정성을 상품화하면서, '생각하지 않아도 감동할 수 있는 예술'을 만들어내는 데 성공했다. 키치는 바로 이 체제의 문화적 상징이다.

Andy Warhol(1928-1987) - 「Micky」(1982)

이 현상은 전체주의 체제에서 더욱 노골적으로 드러난다. 히틀러의 독일, 무솔리니의 이탈리아, 스탈린의 러시아—이 모든 곳에서 키치는 공식 예술로 자리 잡았다. 그 이유는 단순하다. 전체주의는 대중의 수준을 향상시킬 능력이 없기 때문에, 문화를 대중의 수준으로 끌어내릴 수밖에 없다. 난해하고 비판적인 아방가르드는 억압되고, 단순하고 감정적인 키치가 권장된다. 키치는 정치적 선전의 도구로 기능한다. 감정은 즉각적이고, 의미는 단순하며, 메시지는 명확하다. 그린버그는 키치가 전체주의 체제의 필연적 산물임을 지적한다. 그는 "키치는 독재자가 '대중의 영혼'과 더 밀접하게 접촉할 수 있게 하며, 그 막대한 이익은 대중의 여가를 조작함으로써 그들을 체제에 복종시킨다"라고 말한다.⁴ 따라서 후대의 해석자들은 이를 "히틀러와 스탈린은 단지 속물이어서가 아니라, 그들의 체제가 키치를 필요로 했기 때문에 키치를 선택했다"는 식으로 요약한다. 키치는 대중을 지배하기 위한 가장 효율적인 문화적 기술이었다.

결국 그린버그는 예술의 자율성과 진정성을 지키기 위해서는, 자본주의의 논리로부터 벗어나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는 단순한 낭만적 혁명을 꿈꾸지 않는다. 그는 "이제 우리는 사회주의가 새로운 문화를 만들 것이라 믿지 않는다. 우리는 다만 사회주의만이 아직 살아 있는 문화를 지킬 수 있다고 믿는다"라고 말하며, 예술의 구원이 새로운 창조가 아니라 '보존'에 있다고 본다. 그린버그는 "더 이상 새로운 문화가 예전처럼 다시 태어날 것이라 믿을 수 없고, 다만 남아 있는 문화의 잔존을 지키는 일만이 가능하다고 믿을 뿐"이라고 한다.⁵ 그는 예술의 혁명적 재탄생보다, '잔존의 보존(preservation of remnants)'을 말한다. 이는 자본주의적 타락 속에서도 예술의 정신적 생명력을 지키려는 마지막 철학적 선언이다. 예술의 생명은 제도나 체제가 아니라, 인간 정신의 자유에 달려 있으며, 그것은 자본주의적 대량생산 체제 안에서는 유지될 수 없다고 본 것이다.

「Avant-Garde and Kitsch」는 단지 예술과 대중문화의 구분을 논한 글이 아니다. 그것은 근대 예술이 처한 역사적 운명에 대한 철학적 성찰이다. 그린버그는 예술이 사회적 타락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자기 안으로 물러설 수밖에 없음을 인식하면서도, 그 '퇴각'이야말로 인간 정신이 세계와 맞서 싸우는 마지막 형태라고 보았다. 아방가르드는 고립 속에서 인간 정신의 존엄을 지키는 유일한 예술이며, 키치는 그 정신이 포기된 자리에서 태어난 산업화된 감정의 잔재다. 그린버그의 비평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하다. 디지털 이미지와 알고리즘이 감정을 조작하는 시대, '즉시 감동'과 '자동 감정'이 일상이 된 지금, 우리는 다시 묻게 된다. 예술은 여전히 스스로의 진실을 지킬 수 있는가? 그리고 우리가 느끼는 감정은 진짜인가, 아니면 이미 키치의 손에 의해 대량 생산된 것인가?


Notes

1. "The avant-garde poet or artist tries in effect to imitate God by creating something valid solely on its own terms." 6p.

2. "When one’s society is no longer able to justify the inevitability of its own existence, the artist finds himself turning inward, seeking in art the justification that society can no longer offer." 5p.

3. "Kitsch is mechanical and operates by formulas. Kitsch is vicarious experience and faked sensations. Kitsch changes according to style, but remains always the same." 9p.

4. "Kitsch keeps a dictator in closer contact with the 'soul' of the people, and its enormous profits keep the masses in line by diverting their leisure." 10p.

5. "We can no longer believe that a new culture will arise in the same way as the old ones.

We can only believe that it will preserve what was left of the old culture." 10p.


Reference

Greenberg, Clement. "Avant-Garde and Kitsch." In Art and Culture: Critical Essays, 3-21. Boston: Beacon Press, 1961.


네이버 블로그


글쓴이 저서


현대미술이 어려운 이유─현대미학과 그의 변명


형이상학적 시선─보이지 않는 침묵과 형상

keyword
작가의 이전글푸코의 해석학─표지와 깊이의 전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