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울 클레(Paul Klee, 1879–1940)는 20세기 초 유럽 아방가르드에서 독보적인 형식 체계를 구축한 화가이자 교육자이며, 추상미술의 언어를 결정적으로 확장한 인물이다. 그는 회화를 단순한 재현의 기술로 보지 않았고, 예술의 임무는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게 만드는 데 있다¹는 명제를 중심으로, 세계의 내적 질서와 운동을 감각적 형태로 출현시키는 방식을 탐구했다. 클레에게 ‘보이게 한다’는 것은 시각적 사실을 정확하게 모사하는 것이 아니라, 세계가 스스로 드러내지 않은 잠재적 구조를 형식으로 번역하는 창조적 과정을 의미했다.
클레의 예술적 태도는 그의 생애 전반에서 일관되게 드러난다. 음악가 가정에서 성장한 그는 초기부터 리듬 감각과 구조적 사고를 바탕으로 회화적 실험을 전개했고, 특히 1914년 튀니지 여행은 그의 작업 전환점이 되었다. 이 시기 그는 “색채는 이미 나를 소유했다”고 말하며², 색이 단순한 시각적 장식이 아니라 작품의 구조를 이끄는 힘으로 작용함을 체감했다. 이후 색채는 화면의 공간을 분할·결합하고, 밀고 당기며, 회화적 질서를 만들어가는 주체적 요소가 되었다.
바우하우스에서의 활동은 클레의 예술 이론이 체계화되는 시기였다. 그는 선, 점, 면, 색과 같은 기본 요소들을 단순한 조형어휘로 취급하지 않고, 형식이 생성되는 과정, 즉 ‘형태의 발생’에 주목했다. 이런 맥락에서 그가 남긴 “선은 점이 산책을 떠난 것이다”라는 유명한 말³은 기초 조형 요소를 존재론적 사건으로 재정의하는 발언이다. 선은 고정된 기호가 아니라 점의 운동이 남긴 흔적이며, 세계의 리듬과 힘을 드러내는 일종의 ‘생성의 기록’이었다.
이러한 사유는 메를로퐁티의 지각론과도 깊이 상응한다. 메를로퐁티는 “보는 행위는 세계가 스스로를 접었다 다시 펼치는 운동”이라고 말했는데⁴, 클레의 회화는 바로 그 운동을 감각적 형태로 붙잡아낸다. 선은 걷고, 색은 호흡하며, 형태는 안정된 상태에 머물기보다 생성의 과정 속에서 실현된다. 클레에게 드로잉은 세계가 스스로 움직이며 드러내는 내적 질서의 흔적을 손으로 받아 적는 존재론적 행위였다.
그가 자연을 바라보는 방식 역시 발생적이다. 클레는 “나는 자연을 모방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과 함께 일한다”고 선언하며⁵, 자연의 외형이 아니라 자연의 형성 원리—성장, 리듬, 분화, 구조—를 회화적 언어로 번역하고자 했다. 이는 추상적 기하학을 탐구한 몬드리안이나 정신적 진동을 강조한 칸딘스키와는 다른 층위에서, 자연의 생명적 원리를 회화와 결합시키는 독창적 태도였다.
한편, 클레의 작업은 아도르노의 부정미학과도 미묘하게 접점을 갖는다. 아도르노는 예술을 “화해되지 않은 세계의 상처를 드러내는 형식”으로 보며⁶, 예술의 비타협성을 강조했다. 클레는 직접적으로 세계의 상처나 사회적 모순을 묘사하지는 않았지만, 세계의 불안정성과 비가시적 긴장을 드러내는 방식으로 형식을 구성했다. 흔들리는 선, 분절된 색면, 완결되지 않은 구조는 세계가 조화롭지 않으며, 현실이 내부적으로 긴장으로 차 있다는 사실을 은유적으로 드러냈다.
요컨대 클레에게 예술가는 세계의 외형을 충실히 재현하는 사람이 아니라, 세계 내부에서 작동하는 힘과 관계를 감각적 구조로 변환하는 존재였다. 그의 회화는 완성된 결과물이라기보다, 세계가 스스로를 드러내는 과정의 시각적 흔적이다. 이미 존재하는 세계를 그리는 것이 아니라, 세계가 ‘될 수 있는 것들’을 드러내는 일이다. 선이 걷고, 색이 호흡하며, 형태가 생성되는 순간—클레의 회화는 단순한 이미지가 아니라 세계의 잠재성이 형식으로 변환되는 장소가 된다.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 그의 예술론은 추상미술의 기반을 넘어, 지각·세계·형식의 관계를 다시 사유하게 만드는 지속적 철학적 의의를 지닌다.
1. Paul Klee, The Thinking Eye, ed. Jürg Spiller (London: Lund Humphries, 1961), 76.
2. Ibid., 388.
3. Ibid., 105.
4. Maurice Merleau-Ponty, L’Œil et l’Esprit (Paris: Gallimard, 1964), 14.
5. Paul Klee, The Thinking Eye (Spiller ed.), 52.
6. Theodor W. Adorno, Ästhetische Theorie (Frankfurt: Suhrkamp, 1970), 98.
Adorno, Theodor W. Ästhetische Theorie. Frankfurt: Suhrkamp, 1970.
Kandinsky, Wassily. Concerning the Spiritual in Art. New York: Dover, 1977.
Klee, Paul. The Thinking Eye: The Notebooks of Paul Klee. Vol. 1. Edited by Jürg Spiller. London: Lund Humphries, 1961.
Merleau-Ponty, Maurice. L’Œil et l’Esprit. Paris: Gallimard, 196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