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코의 해석학─표지와 깊이의 전복

Foucault, M. 「Nietzsche, Freud, Marx」

by 오경수
Rene Magritte(1898-1967) - 「The treachery of images (This is not a pipe)」(1928)

해석학의 역사적 맥락에서 푸코는 언어와 해석의 문제를 그리스 고대에서부터 19세기에 이르는 흐름 속에서 바라본다. 그리스 전통의 해석 방식은 크게 세 가지가 있다. 알레고리아(allēgoria)와 후포노이아(huponoia), 그리고 세마이논(sēmainon)이다. 먼저 앞의 두 가지—알레고리아와 후포노이아—는 언어가 표면적으로 드러내는 의미 아래 숨겨진 의미가 있다는 의심에서 비롯되었다.

알레고리아(ἀλληγορία, allegoria)는 표면적으로는 어떤 말을 하지만 실제로는 다른 의미를 말하는 것, 즉 은유적 발화를 의미한다. 언어는 이야기의 형태로 말하지만 그 밑에는 감추어진 진의(眞意)가 있다고 보는 것이 알레고리아이다. 간단히 말해, 알레고리아는 '겉으로는 이렇게 말하지만 사실은 저것을 의미한다'는 방식의 해석이다. 후포노이아(ὑπόνοια, huponoia)는 문자적 의미 아래 숨겨진 깊은 뜻이나 내재된 진리를 탐색하는 해석 방식이다. 단순히 '다르게 말한다'가 아니라, 말 아래 숨어 있는 사유를 파헤치는 태도이자 해석 방식이 바로 후포노이아이다. 세마이논(σημαῖνον, sēmainon)은 그리스어로 '표하는 것', '의미하게 하는 것'으로, '기표(signifier)'의 아주 오래된 원형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푸코가 말하는 세마이논은 단순한 언어학적 개념이 아니다. 그것은 언어가 아닌 것들까지도 말을 한다고 여기는 고대적 감각 전체를 지칭한다. 푸코는 "세상에는 말이 아니면서도 말하는 것들이 존재한다는 믿음, 이것이 세마이논의 세계"라고 말한다.¹

그리스 시대의 인간은 자연, 바다, 나무의 바스락거림, 동물, 얼굴, 가면, 심지어 검의 교차까지도 의미를 표하는 것—세마이논—으로 여겼다. 자연의 징후, 별의 배열, 병의 증상, 얼굴의 표정 모두가 언어 아닌 언어였다. 세계 전체가 말하고 있다는 이 믿음 속에서 인간은 자신을 포함한 만물을 해석의 질서 안에 두었다.


16세기의 르네상스 시대에 세계는 '유사성(resemblance)'의 질서 속에서 이해되었다. 사람들은 사물들 사이의 닮음, 조응, 반복되는 형상을 신의 언어로 여겼고, 별자리와 인간의 몸, 식물과 장기, 돌과 별빛까지도 서로를 비추는 징표로 보았다. 모든 것은 서로를 닮음으로써 하나의 의미망 안에 있었으며, 세계는 투명하고 조화로운 질서로 엮여 있었다.

이 시기의 "표지(sign)"는 진리를 가리는 가면이 아니라, 신이 세계 곳곳에 남겨둔 친절한 흔적이었다. 표지를 읽는다는 것은 감추어진 신의 질서를 해독하는 행위였고, 해석이란 세계가 이미 스스로를 말하고 있는 언어를 듣는 일이었다. 르네상스의 해석학은 사물의 유사성과 그로부터 흘러나오는 조응의 질서 위에서, 세계를 하나의 열린 텍스트처럼 읽던 시대의 사유를 보여준다.


17세기와 18세기에 들어서면서 르네상스의 유사성 중심의 세계관은 균열을 맞았다. 베이컨과 데카르트는 사물의 닮음 속에서 진리를 읽어내려는 해석학을 비판하며, 유사성의 사슬을 끊고자 했다. 세계는 더 이상 징표로 가득 찬 살아 있는 언어가 아니라, 분석과 분해, 명석한 인식의 대상으로 바뀌었다. 신의 흔적을 해독하던 해석학은 점차 침묵했고, 그 자리를 합리적 이성과 과학적 방법이 대신했다.

그러나 19세기에 이르러 마르크스, 니체, 프로이트는 다시금 해석의 기획을 근본적으로 뒤흔들었다. 그들은 세계가 단순히 투명하게 드러나는 질서가 아니라, 그 자체로 이미 해석의 산물이며 힘의 작용이 새겨진 표면임을 드러냈다. 푸코의 말처럼, "표지는 더 이상 의미를 비추는 창이 아니라, 욕망과 권력, 무의식이 만들어낸 해석의 결과이자 그 힘을 은폐하는 장치가 되었다. 세계는 다시 한 번 말하기 시작했지만, 이번에는 신의 목소리가 아니라 인간의 욕망과 체계, 그리고 그 밑에 흐르는 무의식의 언어로 말하고 있었다."²

Diego Velazquez(1599-1660) - 「Las Meninas」(1656)

마르크스, 니체, 프로이트는 각각 다른 길 위에서 해석의 방식을 근본적으로 전환시켰다. 그들은 르네상스의 표지가 머물렀던 수평적이고 균질한 공간을 떠나, 표지를 '깊이'와 '외부성'의 차원에서 새롭게 배치했다. 표지는 더 이상 신의 조화나 자연의 질서를 드러내는 투명한 매개가 아니라, 인간의 사유와 욕망, 무의식이 얽혀 있는 복합적인 층위가 되었다.

니체에게 철학이 말해온 '깊이'는 진리를 향한 순수한 탐구가 아니라, 위선과 가면을 숨기기 위한 허구적 내면성이었다. 그는 해석자가 깊은 곳을 발굴하는 자가 아니라, 그 ‘깊이’라 불린 것을 표면 위로 뒤집어 드러내야 한다고 보았다. 푸코는 이를 "깊이라 불리던 것은 결국 하나의 놀이이자 표면의 접힘에 불과하다"라고 요약한다.³


마르크스는 자본주의 사회가 스스로를 감싼 신비의 장막을 벗겨냈다. 자본과 가치는 심연적 비밀을 품은 것이 아니라, 평면성의 위장을 통해 단순한 교환 관계를 감추는 허구일 뿐이었다. 프로이트는 의식과 무의식의 지형을 새롭게 구성함으로써, 해석의 공간을 전환시켰다. 그는 환자의 몸과 언어, 그리고 분석가의 시선이 교차하는 자리에서 해석이 시작된다고 보았다.

이렇게 세 사상가의 사유는 표지를 다시 구성했다. 그들은 모두 깊이의 환상을 걷어내고, 의미가 외부에서, 표면의 뒤틀림과 접힘 속에서 작동함을 드러냈다. 해석은 더 이상 진리로의 하강이 아니라, 표면 위에서 일어나는 운동, 드러남과 감춤의 반복 그 자체가 되었다.

이후 해석은 종결점을 갖지 않게 되었다. 세계는 고정된 의미의 구조로 닫히지 않고, 끝없이 서로를 해석하는 표지들의 얽힘 속에서 스스로를 드러낸다. 해석은 언제나 이미 해석된 것을 다시 해석하는 행위이며, 그 끝은 결코 도달할 수 없는 지점으로 미끄러진다. 푸코는 "해석할 '무언가'는 따로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것은 이미 해석"이라 말한다.


이 무한한 해석의 운동은 동시에 위험을 내포한다. 해석이 그 극점에 다다를 때, 해석자는 진리의 중심을 발견하는 대신 자신이 해석 속으로 흡수되어 사라질 위험에 놓인다. 니체에게 해석의 끝은 절대적 지식의 파열이었고, 프로이트에게 그것은 무의식의 심연 앞에서 마주한 불안이었다. 해석은 그 자체로 미끄러지는 행위이며, 그 끝에는 언제나 광기나 침묵의 가능성이 드리워져 있다.

푸코에게 해석은 본래의 실체를 밝혀내는 길이 아니다. 해석은 언제나 폭력적이다. 그것은 기존의 의미를 뒤엎고 새로운 관계를 창조하는 힘이다. "표지는 스스로를 정당화하려는 해석이지, 해석이 표지를 정당화하는 것이 아니다."⁵ 진리는 해석의 결과가 아니라, 해석이 교차하고 충돌하며 서로를 지워나가는 그 과정 속에서만 순간적으로 드러난다.

결국 해석은 자기 자신으로 되돌아온다. 해석은 더 이상 객관적인 세계를 향하지 않고, '누가 해석하는가'라는 질문으로 회귀한다. 해석자는 해석의 주체이자 동시에 그 안에 포획된 존재이며, 해석은 자신을 되비추는 순환의 거울이 된다. 푸코의 말처럼 , "해석의 죽음은 표지가 있다고 믿는 것이고, 해석의 생명은 오직 해석만이 존재한다고 믿는 것이다."


푸코는 해석학과 기호학의 긴장을 통해 근대 사유의 핵심적인 균열을 드러낸다. 마르크스, 니체, 프로이트는 이 균열 속에서 표지의 본성을 근본적으로 전복하며, 해석을 더 이상 진리의 발견이 아니라 해석 자체의 운동으로 돌려놓았다. 그들에게서 해석은 완결되지 않는 순환이자 폭력의 행위이며, 해석의 대상은 결국 세계가 아니라 해석자 자신이다. 진리는 고정된 실체로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해석이 교차하고 충돌하며 끊임없이 자신을 되풀이하는 과정 속에서, 표면의 접힘과 흔들림으로 잠시 드러날 뿐이다.


Notes

1. "Language... has always given birth to two kinds of suspicions: that it does not mean exactly what it says... and that there are indeed other things in the world which speak and which are not language." (269–270p)

2. "Freud, Nietzsche, and Marx... have not given a new meaning to things that had no meaning. They have... changed the nature of the sign and modified the fashion in which the sign can in general be interpreted." (272p)

3. "Depth... was only a game and a surface fold." (273p)

4. "There is nothing to interpret... for after all everything is already interpretation." (275p)

5. "Signs are interpretations that try to justify themselves, and not the reverse." (277p)

6. "The death of interpretation is to believe that there are signs... The life of interpretation is to believe that there are only interpretations." (278p)


Reference

Foucault, Michel. "Nietzsche, Freud, Marx." In Aesthetics, Method, and Epistemology, edited by James D. Faubion, translated by Robert Hurley and others, vol. 2 of Essential Works of Foucault, 1954–1984, 269–278. New York: The New Press, 19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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