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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경수 Feb 16. 2022

돌아올 수 없는 강 너머엔 무엇이 있을까

Beyond this life

자크 루이 다비드(Jacques Louis David,1748~1825)의 “마라의 죽음(1793)”

  우리 모두는 죽음을 두려워한다. 죽음이란 인간에게 공포의 대상이며, 동시에 미지의 대상이다. 인간이 죽음을 두려워하는 이유는 미지의 대상이기 때문이 아닐까? 인간은 죽음 다음의 세상을 사후세계라 칭한다. 하지만 아무도 사후세계에 가보고 경험담을 들려준 적이 없고, 사후세계가 있다는 것을 인간은 증명할 수 없다. 그렇지만 여러 종교들은 사후세계를 믿으며, 일부 종교에서는 사후세계가 지옥과 천국으로 나뉜다고 주장한다. 지옥은 큰 죄를 짓고 죽은 사람들이 구원을 받지 못하고 끝없이 벌을 받는다는 곳. 반면에 천국은 하느님이나 신불(神佛)이 있다는 이상(理想) 세계 혹은 어떤 제약도 받지 아니하는 자유롭고 편안한 곳 또는 그런 상황을 의미한다. 


  간단하게 말해서 이승에서 좋은 일을 많이 하고 착하게 살면 사후에 천국에 가서 편안한 사후를 맞이 하는 것이고, 나쁜 일을 많이 저지르고 나쁘게 살면 지옥에 가서 영원히 벌을 받는다고 믿어진다. 사람들은 사후세계에 가본 적도 없고, 사후세계에 갔다 온 경험을 들려준 사람도 없는데 왜 이런 믿음을 가질까? 이러한 믿음을 가지게 된 계기는 종교일 것이다. 현대 사회에서는 종교의 영향력이 과거에 비해 아주 약하지만, 과거 르네상스 이전까지는 종교의 수장인 교황이 나라의 왕보다 권력이 막강했다. 황제를 즉위시키는 의식인 대관식에서 교황이 무릎을 꿇은 황제에게 왕관을 씌어주는 것을 보면 이를 추측할 수 있다. 

카롤루스 대제에게 교황 레오 3세가 서로마제국 황제 관을 씌워주는 장면을 그린 그림

  종교가 세상의 헤게모니를 쥐던 시절부터 우리는 사후세계에 대한 믿음을 갖게 된 것이 아닐까? 사후세계는 어쩌면 종교적 신화에 불과한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우리는 죽어보지 않는 이상 이 신화가 진실인지 거짓인지 알지 못한다. 또한 사후세계에 대한 진실을 알아도 우리는 진실을 살아있는 사람들에게 전달할 수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사후세계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 


  사후세계를 부정하고 나의 쾌락만을 추구하며 후회 없는 인생을 살아야 할까? 아니면 사후세계가 존재한다는 가정 하에 착하게 살아야 할까? 알고 보니 죄를 많이 지어야 천국에 가고, 선행을 많이 하면 지옥에 간다면 어떻게 살아야 할까?


  죽음은 인간에게 두려운 대상이다. 죽음 이후에 어떤 세상이 존재하는지에 대한 무지에 의한 두려움 일 것이다. 죽음 뒤가 행복의 정원 일지, 아나키즘(Anarchism)이 판치는 매드 맥스 일지, 불교에서 말하는 윤회사상처럼 다른 인간으로 다시 태어나는지는 아무도 모르고, 증명할 수 없다. 만약 죽음 뒤가 행복의 정원이라면 빨리 죽은 사람일수록 이득을 본 것일 거다. 치열한 경쟁사회인 이승보다 행복의 정원에서 행복을 누리는 것이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더 좋을 것이다. 사후세계가 행복의 정원이라면 우리는 이승에서 어떻게 살아야 할까?


  이번에는 매드 맥스와 같은 세상이 사후세계라고 가정해 보자. 천국은 존재하지 않고, 혼란만이 존재하는 사후세계라면 누구나 죽기 싫을 것이다. 100년 동안 힘들고, 착하게 살아왔는데 그다음이 매드 맥스라면 너무 허망하지 않을까? 사후세계가 매드 맥스라면 열심히 살아온 사람은 그동안의 인생이 굉장히 허망하고 후회스러울 것이다. 이승에서 아무리 많은 재산을 모으고, 명예를 지녔어도, 사후세계에서는 그저 하나의 워보이일 뿐인데, 사후세계가 행복의 정원이 아니라 매드 맥스라면 이승에서 어떻게 살아야 할까?


  그렇다면 이번에는 죽음 이후에 사후세계는 존재하지 않고, 다시 태어난다고 가정해 보자. 다시 태어나면 전생은 아무 의미가 없고, 기억도 나지 않을 것이다. 또한 현생과 완전 다른 인생을 살 수도 있다. 현생에는 전교 꼴등의 문제아지만 다음 생에는 전교 1등의 영재 일 수도 있고, 그 반대 일 수도 있다. 죽음에 대해 우리가 알지 못하는 것처럼 다음 생 또한 존재한다면 우리는 전혀 모를 것이다. 죽음 다음이 미지의 환생이라면 지금의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할까?


  우리는 사후에 앞에서 다룬 세 가지 경우처럼 될 수도 있고, 혹은 전혀 상상하지 못한 일을 겪을 수도 있다. 앞의 경우들은 죽음 뒤의 삶과 죽음 전의 삶은 전혀 연관이 없으니 현생을 열심히 살아가는 사람에겐 허무한 결과 일 수 있다. 또한 누구라도 인생이 저런 결말이라면 열심히 살고 싶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죽음 뒤에 무엇이 우리를 기다리는지 모르는데, 왜 열심히 살아야 할까? 아니 어떻게 살아야 할까?


  미지의 사후세계를 생각하면 허무주의적으로 삶을 바라볼 수 있다. 죽음 후에 천국이 있는지 없는지 모르는데 선행을 해야 할까? 하는 고민이 들 수도 있고, 반대로 천국이 없고 선악에 상관없이 편안한 유토피아로 간다고 생각하여 마음대로 행동할 수도 있을 것이다. 


  허무주의적으로 인생을 보던, 신학적으로 인생을 보던지 우리는 현재의 삶을 살고 있고, 현재의 삶에 충실하다. 50년 뒤에 내가 죽어서 지금 옆에 있는 사람을 보지 않게 되더라도, 옆에 있는 사람은 지금 나와 함께 있는 것이다. 당장 내일 안 볼 사람이라면 우리는 그 사람을 함부로 대할 수 있지만, 우리는 함부로 대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삶은 짧지 않고, 우리는 미래를 예견할 수 없기에 즉, 나중에 어떻게 만날지 모르기에 함부로 대하지 않는다. 인간은 하루살이가 아니라 더 신중히 살고, 호모 사피엔스이기에 도덕적으로 산다. 그렇다면 죽음 뒤를 모르는데 왜 도덕적으로 살아야 할까?


  인간은 흔히 사회적 동물이라고 불린다. 그 이유는 혼자서 살아갈 수 없기 때문에 사회에 속함으로써 자신을 유지해 나가기 때문이다. 그래서 원만한 사회관계를 위해서 우리는 이기심보다는 이타심 있는 행동을 하려고 애를 쓴다. 또한 타인을 의식하여 자기 검열을 하기도 한다. 어차피 죽으면 다 끝인데 왜 그럴까?


  우리는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면 안 된다는 것을 기본 덕목으로 삼기 때문이다. 아무리 인생이 유한하고, 짧더라도 우리는 현실에 충실하고, 지속적으로 쾌락을 추구한다. 그런데 내가 누군가를 방해한다면, 나도 상대방에게 방해를 받을 수 있다. 그래서 나 자신을 존중받기 위해서 우리는 타인을 존중한다. 이것이 우리가 도덕적으로 사는 본질적인 이유일 것이다. 


  이제는 미지의 죽음을 기다리는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우리는 사후세계는 모르지만 이승에서의 삶은 안다. 이틀 뒤에 약속이 있으면, 미리 준비할 수 있고, 과거의 실수를 통해 미래에 실수를 예방할 수도 있다. 하지만 내가 싫어했던 사람이 내일은 나에게 필요한 사람이 될 수도 있는 것처럼 우리는 우리의 앞날을 모를 수도 있다. 


  나는 누군가가 나에게 어떻게 살아야 하냐고 묻는다면 이렇게 답할 것이다. 

사후세계처럼 인간의 이성으로 예측할 수 없는 미래는 고민이나 걱정할 필요가 없다. 이성으로 해결하고 예측할 수 있는 미래를 준비하는 것이 인생을 사는 방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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