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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경수 Apr 18. 2022

panta rhei

πὰ ντα ρ̀εὶ

"우는 철학자" 헤라클레이토스(Heraclitus, B.C 535~475?)

  같은 강에 두 번 발을 담글 수 없다. 이 말은 고대 철학자 헤라클레이토스가 한 말이다. 그는 왜 같은 강에 두 번 발을 담글 수 없다 했을까? 헤라클레이토스는 파르메니데스와 반대로 세상의 만물은 변화한다고 주장했다. 그래서 그는 만물의 아르케(Arche)가 '불'이라 했다. 그가 불을 아르케 정한 이유는 모든 것이 불로 만들 졌기 때문이라고 오해를 할 수 있으나, 그렇지 않다. 헤라클레이토스가 불을 아르케로 정한 이유는 불의 형상 때문이다. 불은 물과 달리 정지해 있지 않고 끊임없이 연소한다. 그래서 우리가 타고 있는 불을 보면 정지해있다고 느끼기보다는 불이 춤추듯이 활발히 움직이고 있다고 느낄 것이다. 


  그렇다면 왜 같은 강에 두 번 발을 담글 수 없을까?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헤라클레이토스는 만물이 끊임없이 변화한다고 한다. 그가 말하는 변화는 마치 인간이 들숨에 산소를 흡수하고 날숨에 이산화탄소를 배출하듯이, 음식을 먹고 배설하듯이, 버스를 타고 내리는 것과 같다. 이처럼 강물도 흐른다. 내가 8시에 계곡물에 발을 담갔다가 8시 5분에 다시 발을 담그면, 과연 나는 같은 물에 발을 담그는 것일까? 나는 같은 물에 발을 담글 수 없다. 내가 다시 담그고 싶어 하는 그 물은 이미 저 너머로 흘러갔다. 


  인간이야 말로 이러한 '판타 레이'의 산물이라 말할 수 있다. 우리는 끊임없이 변화한다. 이 글을 쓰는 지금 내 몸을 구성하는 세포들도 끊임없이 변하고 있다. 피부는 끊임없이 벗겨지고, 4주마다 완전히 새 피부로 바뀐다고 한다. 인간은 본인의 의지와 상관없이 4주마다 한 번씩 가죽옷을 갈아입고 있는 것이다. 피부뿐만 아니라 우리의 정신 또한 판타레이를 겪는다. 10년 전의 나와 지금의 나 그리고 10년 후의 나는 같은 개인 일지라도 가치관은 완전히 다를 것이다. 신체적 변화는 어쩔 수 없다. 시간은 흐르고 나는 내 원자와 전자를 통제할 수 없기에 평생 붙잡아 둘 수 없다. 그런데 왜 정신은 비물질적 존재인데 변화할까? 


  인간의 정신이 계속 변화하는 이유는 물질적인 근원이 아니다. 인간의 정신이 계속 변화하는 이유는 계속 무언가를 하고 시간이 흐르기 때문이다. 무언가를 한다는 것은 행위일 수도 있고, 사회적 관계일 수도 있고 무엇이든 포함할 수 있다. 그러한 것들이 왜 인간의 정신에 변화를 줄까? 인간은 생각을 하기 때문이다. 인간은 기계론적인 존재가 아니라 생각하는 주체이다. 그래서 최선을 다해서 목표를 이루려 노력을 해도 성과가 보이지 않는다면, 인간은 문제점을 찾고 그 부분을 고친다. 또한 그 실패로 인해 교훈을 얻을 수 있다. 실패뿐만 아니라 성공도 인간의 정신에 변화를 준다. 중학교 2학년은 이차방정식을 풀 때 인수분해만을 이용해서 푼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근의 공식을 배우고 그 공식을 이해하고 적용하는 데 성공한다면, 이차방정식을 풀 때 인수분해보다 근의 공식으로 해를 구해서 더 빨리 문제를 풀 것이다. 


  인간에게 가장 영향력 있는 판타 레이는 인간관계가 아닐까 싶다. 우리는 만난 모든 사람을 평생 만날 수 없다. 만남이 있다면 이별이 있는 건 필연이다. 누군가와 태어날 때부터 죽을 때까지 옆에 있었다고 해도, 만남과 이별은 피할 수 없다. 연애를 예로 들면, 우리는 누군가를 만남으로써 상대방에 대해 알게 되고, 그 만남을 통해 인간이라는 존재에 대해 더 알게 된다. (물론 사람마다 기호가 다르기에 먼저 만난 사람에게서 배운 것이 다음에 만나는 사람에게 적용된다는 보장이 없긴 하지만, 인간 사는 게 다 거기서 거기 아닐까?) 결국 수많은 판타 레이로 지금의 내가 존재하는 것이다. 음악에 관심 없던 내가 기타를 배우고, 인문학을 경시하던 내가 푸코의 책들을 읽고 글을 쓰고 그리고 누군가를 만남으로써 사람을 대하는 방식과 생각이 바뀌는 것처럼 나는 끊임없이 변화하는 중이다. 이 변화는 내가 죽을 때까지 이어질 것이고, 이 변화의 끝은 내 죽음을 의미할 것이다. 


  지금 나는 무엇을 겪으며 나의 어떤 점이 변화하고 있을까? 나라는 불은 꺼지지 않고 끊임없이 연소 중이다. 판타 레이를 이해하고 받아들인 후, 나는 변화가 두렵지 않다. 오히려 다양한 변화로 내가 어떤 영향을 받을지 기대가 된다. 원래는 싫어하는 상황이나 사람을 피하는데 급했으나, 요즘은 다 부딪히고 있다. 철학과에서 강의를 들으니 조별과제와 토론은 특별하지 않은 소소한 일상이다. 그 과정을 통해 여러 사람과의 교류도 거침없이 하게 되고, 내 감정을 더 솔직히 표출하게 되는 등 나에게 큰 변화를 가져오게 되었다. 과거에는 끌려다니며 따라가는 사람이었지만, 요즘은 follower가 아닌 subject가 된 것 같다. 내 주장이 틀린 것 같아도 그냥 서슴없이 얘기하고, 친하지 않은 사람에게 말을 걸고 싶으면 그냥 말을 건다. 이러한 판타 레이는 현재 진행 중이고, 미래에도 진행 중 일 것이다. 


  변화의 집약체 혹은 산물인 인간이 어떻게 남에게 평가받으며, 어떻게 획일화가 될까? 같은 시련을 겪어도 얻는 교훈이 다 다른데 우린 왜 같아져야 한다고 강요를 받는 것일까? 모든 것은 변화하기 마련인데, 왜 세상은 변하지 않는 진리가 있는 것처럼 돌아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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