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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경수 Jun 30. 2022

아브락사스와 실존주의

선택의 기로에 던져진 인간들

알베르토 자코메티(Alberto Giacometti,1901~1966) - 걷는 사람(1961)

  너무 말라서 기괴스러울 수도 있고, 어두운 배경 때문에 더욱 어두운 분위기의 작품처럼 느껴질 수도 있다. 하지만 나는 위의 작품을 좋아한다. 자코메티는 실존주의 철학에 영감을 받아서 작품을 만든 것으로 유명하다. 그래서 자신의 운명도 모르는 채 하루하루 불안하게 기투하는 인간의 불안과 슬픔을 걷고 있는 앙상한 조각으로 표현한 것은 아닐까? 나는 개인적으로 에곤 쉴레(Egon schiele,1890~1918)라는 작가도 좋아한다. 에곤 쉴레는 클림트의 제자로 유명한데, 그의 특이한 어둡고 앙상한 그림체로 인간의 어두운 면을 보여주는 표현주의 작품들로도 인정받은 예술가이다. 에곤 쉴레의 그림을 보면 나에게 말을 거는 것 같다. 

"나를 봐. 너도 나처럼 추악한 인간이잖아. 부정하더라도 나와 같은 걸 알잖아."

에곤 쉴레의 자화상

  연약하고 불안한 인간의 모습과 미래를 향해 스스로를 던지는 기투를 나타내는 자코메티의 조각들도 나는 표현주의(Expressionism) 작품으로 느껴진다. 에곤 쉴레가 만약에 조각가였다면 자코메티와 비슷한 작품을 만들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새는 알에서 나오려고 한다. 
알은 세계다.
태어나려는 자는 한 세계를 깨뜨려야 한다.
새는 신에게로 날아간다.
신의 이름은 아브락사스다.
- 데미안 (written by 헤르만 헤세) 中 -


  어제는 자코메티와 실존주의에 대한 자료를 봤고, 오늘은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을 읽었다. 어제 나름 실존주의에 대해 고민하다가 잠에 들어서 그런지, 데미안을 읽으면서도 그 안에서 실존주의를 느낄 수 있었다. 작품 초반에 싱클레어가 프란츠에게 한 거짓말 때문에 그에게 협박을 받아 불안해하는 장면이 마치 위의 자코메티의 작품과 같이 느껴졌다. 위의 작품은 마치 부모님이 부르면 저금통에서 돈을 가져간 것 때문인지 불안에 떠는 그의 모습과 프란츠가 언제 갑자기 나타나서 불쾌한 심부름을 시킬지 불안에 떠는 싱클레어의 모습과 같이 느껴진다. 싱클레어는 친구들 앞에서 가오를 잡고 인정받고 싶어서 거짓 무용담을 펼쳤는데, 프란츠가 그 사실을 신고할 것이라고 싱클레어에게 협박을 한다. 프란츠는 싱클레어에게 거금을 요구하지만, 어린 싱클레어는 그 정도의 돈이 없었다. 그래서 싱클레어는 프란츠의 입을 막기 위해서 그에게 돈과 케이크를 주고, 그가 시키는 악행들을 하며 그의 종노릇을 했다. 하지만 데미안의 도움을 받아서 그 불안에서 벗어난다.


  싱클레어의 거짓말과 악행은 거짓 무용담에 의해 생겨는 것이다. 싱클레어가 만약에 가오를 잡지 않았더라면, 불안에 떨며 저금통을 털지 않았을 것이며, 또한 아파서 학교에 결석하는 일 또한 없었을 것이다. 결국 싱클레어가 프란츠의 종이 된 것 또한 그의 선택에 의해 일어난 결과다. 중간에 싱클레어가 프란츠에게 거짓임을 실토하거나 아버지에게 말해서 도움을 받았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는 다른 선택지를 고르지 않고 프란츠가 시키는 대로 하는 길을 선택했다. 인간은 불안이나 사소한 것 때문에 남들이 보기에 더 낫다고 말하는 선택지 말고 의외의 길을 가기도 한다. 마치 싱클레어처럼. 그리고 본인이 고른 선택에 책임은 당연히 본인이 져야 한다. 왜냐하면 그가 선택한 길이기 때문이다. 싱클레어에게 데미안이 있는 것처럼 그러한 존재가 있으면 좋겠지만, 안타깝게도 다 큰 어른들에게는 데미안이 없을 것이다. 만약 내가 사업을 하다가 부도가 나거나 투자를 잘못해서 파산을 하게 되면 그것은 내 책임이다. 그 또한 내 선택이기 때문에. 우리는 악행에만 책임을 가지는 것이 아니라 모든 행위와 선택에 책임을 갖는다. 인간은 자유의지가 있기 때문에 책임을 지게 되는 것이다. 만약에 세상에 자유의지가 없고 결정론적으로 흘러간다면, 내가 잘못을 저질러도 이건 운명이니까 난 잘못이 없다고 우기면 될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자유의지가 있어서 선행과 악행을 저지르고, 그에 대한 책임은 실행자에게 있다. 그렇다면 결국 프란츠에게 협박받는 싱클레어는 결백하다고 할 수 없지 않을까? 그가 저지른 거짓말에 의해서 손해를 보았기 때문에 그것은 어쩔 수 없는 것이라 나는 생각한다. 만약에 프란츠가 원작과 다르게 반응을 해서 다른 결과가 생겼어도 그것은 싱클레어의 책임이 아닐까 싶다. 그렇다고 프란츠에게 잘못이 없다는 것은 아니다. 프란츠는 또한 부당하게 싱클레어에게 협박을 했기 때문에 데미안의 해결 대상이 된 것이다. 프란츠가 데미안에게 참 교육당한 것이 권선징악이라고도 볼 수 있겠지만, 실존주의 관점에서 보면 그의 행위에 대한 마땅한 책임을 지는 것이다.


  아브락사스는 신적인 것과 악마적인 것의 결합이라는 상징적 과제를 지닌 어떤 신의 이름이라고 데미안에 나온다.  신적인 것과 악마적인 것의 차이는 뭘까? 철학계에 유명한 악마인 라플라스의 악마와 데카르트의 악마는 나쁜 짓을 해서 악마인 것이 아니다. 그들은 전선(善)이라는 성격을 가지지 않고, 전지전능하기 때문에 신이 아닌 악마라고 불리는 것이다. 고로 신과 악마의 차이는 선(善)의 결여 여부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신적인 것과 악마적인 것의 결합이라는 아브락사스는 모순적인 존재하다. 어떻게 무언가를 가지고 있으면 가지지 않을까? 아브락사스는 천사와 악마의 탈을 선택적으로 쓸 수 있는 존재라는 것일까? 


  아브락사스가 천사와 악마의 탈을 다 가진 존재이고, 마음대로 고를 수 있는 존재라면, 마치 인간적인 에토스(ethos)를 가질 것이다. 인간은 본인의 의지에 따라서 선행과 악행을 상황에 맞게 선택할 수 있기 때문에 아브락사스와 같이 선을 가질 수도 있고 가지지 않을 수도 있다. 나는 도덕 행위의 선택성으로 인간의 실존주의를 설명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인간이 자유의지를 가지지 않은 꼭두각시와 같은 존재라면 선의 결여 혹은 소유는 양립이 불가능하며, 교화나 악화는 더더욱 불가능할 것이다. 하지만 인간은 선을 버릴 수도 있고, 본래 소유하지 않았던 선을 소유할 수도 있다. 이 마저도 신의 의지에 의한 운명이라면 악행은 신의 문제이다. 하지만 인간의 이성으로는 신의 존재를 알 수 없으므로, 나는 사르트르의 실존주의를 더 따른다.


  결국 인간의 행동은 자유의지를 가졌기 때문에 모든 행동은 개인의 선택이다. 내가 태어난 것조차도 부모님의 선택에 의한 것이다. 하지만 나라는 사람의 본질은 정해져 있지 않다. 하지만 나는 존재한다. 고로 사르트르는 존재는 본질을 앞선다고 했다. 나의 탄신은 내 선택이 아니지만, 나의 본질은 내가 정하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내 선택에 따라 프란츠처럼 악한 인물이 될 수도 있고, 데미안처럼 남을 도울 수도 있고, 피스토리우스처럼 오르간을 연주할 수도 있다.


  아브락사스와 같은 존재인 여러 인간들이 싱클레어의 상황에 각각 처했다고 가정해보면, 모두가 원작의 싱클레어처럼 거짓말을 하지는 않을 것이다. 누군가는 그 자리에서 프란츠를 때려눕혀서 무용담을 만들 수도 있고, 누군가는 싱클레어처럼 거짓 무용담을 늘어놓을 수 있고, 누군가는 그냥 다른 사람들의 무용담을 들으며 감탄만 하고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모두 자유의지를 가지고 서로 다른 본질을 추구하는 기투체(企投體)이기 때문이다. 우리 모두가 각자의 주인공이기 때문에 각자 다른 인생의 결말을 가지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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