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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경수 Jun 16. 2022

모닝커피

담론에 의한 욕구

프랜차이즈 커피 브랜드 스타벅스(Starbucks) 간판

  언제부터인가 우리 사회에서 커피가 굉장히 중요한 요소가 되었다. 물론 커피를 아예 마시지 않는 사람도 있지만. 그만큼 우리나라의 커피산업도 크게 발전했다. 이제는 카페가 어디에든 있고, 커피를 들고 지나가는 행인도 흔하게 보인다. 왜 갑자기 커피가 생필품에 가까울 정도로 우리에게 중요한 요소가 되었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몇몇 신조어가 커피 소비를 증가시킨 것은 확실하다. 이글의 제목인 '모닝커피'는 아침에 마시는 커피를 의미한다. 아침을 뜻하는 영단어 "Morning"과 "Coffee"의 합성어로 주로 아침에 업무 전에 직장인 마시는 커피와 강의 전에 학생이 사가는 커피를 의미한다. 생산적인 무언가를 하기 전에 아침에 마시는 커피만 모닝커피라 칭하는 것은 아니다. 휴일에 10시까지 늦잠을 자고 일어나자 마시는 커피도 모닝커피다. 모닝커피는 말 그대로 아침에 마시는 커피일 뿐 오후에 뭘 하는지는 그 의미와 상관없다. 


  모닝커피라는 단어가 생긴 후로 한국인의 아침 커피 소비량이 늘었을까 아니면 반대로 소비량이 늘어서 신조어가 생긴 것 일까? 난 둘 다 맞다고 생각한다. 아니 오히려 그 둘이 맞물려서 상호 작용을 일으켰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모닝커피라는 신조어가 생기면서 그 발화 혹은 단어를 접한 대중은 아침에 마시는 커피에 대한 욕구가 생기거나, 원래 아침마다 커피를 마시는 사람은 이 신조어를 체득함으로써 자신의 습관을 문장이 아닌 짧은 단어로 표현이 가능해져서 그 루틴에 대한 욕구가 더욱 체계화됨으로써 더 단단한 습관이 되었다고 난 생각한다. 이 현상은 두 명의 철학자의 이론으로 설명이 가능하다. 


  첫 번째 이론은 미셸 푸코(Michel Foucault,1926~1984)의 이론이다. 그의 저서 '담론의 질서(1971)'에서 푸코는 담론에 의해 주체가 희박해지며, 담론은 권력에 의해 통제되고 있다고 한다. 담론이 통제되는 이유는 그 자체로 하나의 욕구를 형성할 수 있기 때문이다. 현재 우리 사회에서는 허위사실 유포와 같은 선동하는 행위에 대해 처벌을 한다. 이 이유 또한 허위 사실로 인해 대중의 욕구 형성으로, 그들을 선동하여 조종할 수 있기 때문이 아닐까? 공황장애, 우울증과 같은 정신질환 또한 원래는 없었지만, 그러한 병명의 탄생으로 인해서 그러한 질병들이 생긴 것이다. 만약에 A라는 질병과 그 증상을 공표하면, A라는 질병은 존재하지 않아도 사람들은 그 증상이 있으면 그 질병에 걸렸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A라는 질병은 존재하게 된다. 팬데믹 초기에는 사람들이 코로나에 대한 두려움에 의해 열이 조금이 이라도 높으면 자신이 코로나에 감염된 것이 아닌가 의심을 시작하면서 그 증상들이 서서히 나타났다. 하지만 그러한 사람들 중 실제로 코로나에 감염된 사람은 거의 없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검사에서 음성 판정을 받음으로써 감염되지 않음이 밝혀졌다. 그래서 음성 판정을 받은 사람들은 어이가 없었다. 본인의 증상은 완전히 코로나에 감염된 것 같은데 음성 판정을 받았기 때문에. 이러한 사례들을 '코로난가?'라는 신조어로 당시 뉴스에서 소개했다. 즉, 담론의 형성이 대중을 조종한다는 것이다.


  두 번째 이론은 비트겐슈타인(Ludwig Wittgenstein, 1889~1951)의 '사적 언어 논증'과 관련이 있다. 만약 내가 느끼는 특정 감각을 '16'이라고 지정하고 비슷한 감각을 느낄 때 "나는 지금 '16'을 느끼고 있다."라고 할 수 있을까? 결론부터 말하면 불가능하다. 나만이 내가 추적하려고 하는 16이라는 특수한 경험적 체험을 접촉하는 유일한 사람이라 나만이 이 16이라는 단어가 올바르게 사용되는지 추적이 가능하다. 하지만 그 16이라는 감각을 판단할 객관적 기준(올바름의 기준)을 나는 가지고 있지 않아서 비슷한 감각을 모두 16이라고 판단할 것이다. 나는 이 용어를 올바르게 사용하는지에 대한 독립적인 검사가 불가능하다. 비록 내가 16과 비슷하다고 판단할 지라도 나는 틀릴 수 있다. 그래서 그런 용어들을 판단할 객관적인 기준을 가지고 있지 않으면, 용어들이 명백한 적용 대상을 갖는다는 의미는 상실된다. 이것이 비트겐슈타인의 '사적 언어 논증'이다. 


  하지만 '모닝커피'는 '16'과 다르게 객관적인 기준을 갖고, 사적인 언어가 아니기 때문에 내가 아닌 사람도 객관적으로 판단이 가능하다. 내가 만약 아침에 커피를 마시는 것을 내 친구가 봤다면 내 친구는 내가 아침에 커피를 마시는 것을 지각함으로써 "너 모닝커피 했지?"라는 증언이 가능해진다. 비트겐슈타인의 이론을 이용해서 아침에 커피를 마시는 행위를 '모닝커피'라고 공적 언어로 탄생시켰다고 생각해보자. 이는 마치 엑셀에서 매크로를 하는 것과 같다. 매크로란 여러 개의 명령을 묶어 하나의 명령으로 만든 것이다. 마치 '아침에 커피를 마시는 행위'를 '모닝커피'라고 줄인 것과 같다. 매크로는 자주 사용하는 긴 명령어를 단축키를 지정함으로써 사용하게 쉽게 하는 것인데, 모닝커피라는 단어도 아침에 마시는 커피라는 것을 함축하면서 더 자주 사용된다. 


  결국 모닝커피를 마시는 행위는 담론의 형성에 의한 욕구이거나 공적 언어의 탄생에 의해 더 익숙해진 것이 아닐까? 만약 이 모닝커피라는 단어가 탄생하지 않았더라면, 우리는 아침에 밥 대신 커피를 마시는 사람을 이상하게 봤을 수도 있다. 내가 하고자 하는 이야기는 결국 담론의 형성 혹은 공적 언어(단어)의 사용이 대중의 욕구를 만든다는 것이다. 반대로 말하면 공적 언어나 담론을 형성함으로써 대중을 조종할 수도 있다는 이야기이다. 물론 뒷받침할 권력이 있어야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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