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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경수 Jul 31. 2022

인간의 범위와 낙태

a.k.a 삶과 철학 과제


   논문 때문에 컴퓨터를 정리하던 중 교양강의 때 과제로 낸 보고서를 발견했다. 철학을 공부하기 전인 데에도 꽤 잘 쓴 것 같아서 올려본다. 지금 보면 과거에 쓴 글이라 허점도 많이 보이고, 별로이지만, 파일로만 보관하면 잃어버릴게 뻔하기 때문에 여기에 보관하고 싶다.


  우리는 자신의 행복을 보장받기 위해서 타인의 행복을 침해하면 안 된다고 어렸을 때부터 배웠다. 나의 행복이 타인의 행복보다 질적으로 혹은 양적으로 더 크다는 근거가 없기 때문에 우리는 이기심을 정당화할 근거 또한 없다. 내 옆에 있는 친구가 나에게 죽을죄를 지었다고 사고 실험을 해보면, 나에게 친구를 죽일 자격이 있을까? 다르게 말해서, 나의 원한을 해결할 목적으로 그 친구의 미래나 장래 희망들을 침해할 권리가 있을까?


  의무론자들에게 “무고한 사람을 죽이지 마라”라는 법칙을 말한다면, 그들은 당연히 죽이면 안 된다고 할 것이다. 사람을 죽이지 말라는 명령은 근거가 필요 없는 보편적인 정언명령이기 때문이다. 의무론이 무엇인지 잘 모르는 사람들도 이 정언명령에 동의하고 받아들일 것이다. 따라서, 좀 더 철학적으로 사고하기 위해서 우리는 “무고한 사람을 죽이지 마라”라는 말에서 ‘사람’의 범주에 주목해 볼 필요가 있다. 포털 사이트 언어 사전에 ‘사람’이라고 검색했더니 생각을 하고 언어를 사용하며, 도구를 만들어 쓰고 사회를 이루어 사는 동물이라고 나왔다. 만약에 고양이의 울음이 규칙에 따라 다른 의미를 지닌 언어였고, 인간이 도구라 인식하지 못한 사물을 도구로 사용하고, 그들만의 공동체를 구성하고 있다면, 고양이도 사람일까? 그리고 태어난 지 얼마 안 된 신생아는 언어도 모르고 누워서 울기만 하고, 부모님도 못 알아보는데 사람으로 볼 수 있을까? 신생아와 동물이 차이가 있다고 볼 수 있을까?


  고양이와 신생아의 차이는 크게 없을 것이다. 하지만 10년 후에 같은 고양이와 사람은 차이가 아주 클 것이다. 10살이 된 신생아는 학교라는 공동체에서 연필이라는 도구로 공부라는 행위를 함으로써 자기 계발을 하겠지만, 10년 후의 고양이는 과거와 같이 사족 보행하며 알아들을 수 없게 울기만 할 것이다. 경제적인 활동, 지적발달 같은 성취는 고양이에게서 기대하기 어렵다. 따라서 인간과 동물의 선험적 차이는 지능의 발전 가능성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인간은 성장하면서 사고가 가능한 주체가 되지만, 고양이는 성장하면서 몸만 커진 고양이가 될 뿐이다. 그래서 의무론자들은 발전 가능성을 고려하여 낙태라는 행위를 하면 안 된다고 주장할 것이다. 그런데 잠재적 사람인 태아는 언제부터 잠재적 사람이라고 볼 수 있을까? 수정되자마자 잠재적 사람이라고 보기는 어려울 것이다. 수정란은 생명체보다 세포로 규정하는 것이 더 합당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사람과 세포를 규정하는 경계를 고통을 느낄 수 있느냐 없느냐로 본다.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세포를 죽이는 것은 살인으로 취급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의무론자들은 낙태 범위의 조정이 필요하다. 고통을 느끼는 태아의 낙태는 금지해야 하는 것이 맞다. 고통을 느낀다는 것은 주체로서 세상에 존재하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태아의 낙태는 주체를 죽이는 것이라 보기 어렵다. 따라서 의무론자들이 말하는 ‘무고한 사람’에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태아 혹은 수정란은 사람에 포함되기 어렵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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