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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경수 Jul 27. 2022

주느냐, 받느냐

Leveraging or being leveraged?

영화 '기생충(2019)' 포스터

  지난번에 매트릭스라는 영화로 글을 썼는데, 생각보다 반응이 좋았다. 아무래도 영화라는 매개체를 통해 철학과 사유들을 풀어가다 보니, 독자의 입장에서도 이해가 훨씬 쉽고, 흥미가 있었나 보다. (아님 말고) 그래서 오늘은 3년 전에 개봉한 영화 '기생충'을 통해 이야기를 해볼까 한다. 기생충은 봉준호 감독의 영화로 2019년에 개봉했으며, 칸 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받은 작품이다. 국내에서는 약 1,031만 명의 관객수를 기록한 천만 관객 돌파 영화다. 인구가 대략 5천만 명인 우리나라에서 5명 중에 한 명은 이 영화를 봤다고 이야기할 수 있다. 나도 개봉하자마자 극장에서 봤는데, 굉장히 재미있었고, 기억에 많이 남는 영화였다. 특히 이 영화는 흔히 말하는 금수저와 흙수저로 양분되는 우리 사회의 빈부격차를 보여주는 작품이라는 생각이 든다. 아주 극단적인 빈부격차를 보여주는 이 영화에서 집주인인 박사장은 월급을 주지만, 김기사의 가족들은 월급을 받는다. 또한 폭우가 올 때, 박사장 가족은 캠핑에 실패해서 집에 돌아오지만, 김기사의 가족들은 지하에 있는 그들의 집을 지키려 폭우를 뚫고 달려간다. 분명 같은 사람이지만, 이 둘에게 '비' 그리고 '월급'은 극단적으로 반대의 의미를 지닌다.

롭 무어 - 레버리지(2016)

  작년에 아는 형님이 위의 책을 빌려주셨다. 자신이 굉장히 충격을 받았다며, 나에게도 그 충격을 주고 싶다는 이유에 나에게 이 책을 권했다. 나는 "Leverage"라는 단어를 이 책을 통해 처음 알게 되었고, 정말로 충격적인 내용이었다. 당연히 일을 많이 하면 돈을 많이 벌고, 일을 적게 하면 돈을 적게 버는 줄 알았다면, 당신에게도 이 책을 추천한다. 나의 기본적인 경제관념을 깨는 책이었다. 


  "레버리지(Leverage)"는 "Outsourcing" 혹은 "위임"이라고 설명할 수 있다. 회사 내에서 윗사람이 아랫사람에게 업무를 주는 것과 같은 상황을 예로 들 수 있겠다. 이 책에서 말하는 레버리지의 개념 자체도 신선하지만, 더 신선한 것은 우리 모두는 레버리지를 당하거나 레버리지를 하고 있다는 작가의 주장이었다. 그는 레버리지의 개념을 모르는 경우는 대부분 레버리지 당하고 있다고도 주장했다. 쉽게 말해서 부자들은 능동적 레버리지(Active leverage)를 행함으로 가만히 있어도 부를 늘리지만, 노동자들은 수동적 레버리지(Passive leverage)를 당함으로써 부자의 부를 늘려주고, 그 일부로써 자신의 월급을 받는다. 수동적, 능동적 레버리지의 사례들을 보니까 누구나 다 레버리지를 당하거나 행한다는 작가의 의견에 동의가 되지 않는가? 요약하자면, 부자들은 "Leverager"로써 레버리지를 누군가에게 가해서 부를 쌓지만, 서민들은 "Leveragee"로써 레버리지를 당하며 누군가의 부를 쌓아준다. 


  다시 영화 기생충으로 돌아가서, 박사장은 "Leverager"고 김기사 가족은 "Leveragee"이다. 박사장 가족은 요리, 청소와 같은 가사노동, 운전, 강아지 산책, 영어 과외 등 수많은 일을 김기사의 가족들에게 위임(Leverage)한다. 그리고 김기사 가족들은 긍정적으로 그 일들을 수행한다. 그들은 사업에 실패해서 가난한데, 박사장 일가에게서 받는 봉급으로 생계를 유지할 뿐만 아니라 그 전보다 더 나은 생활을 영위할 수 있기 때문이다. 박사장 가족은 귀찮은 일을 떠넘겨서 좋고, 김기사 가족은 그 일을 통해 돈을 벌기 때문에 서로에게 윈윈(win-win)인 셈이다. 만약에 박사장 가족은 김기사 가족이 없으면, 직접 위임했던 일들을 하거나, 다른 사람들을 구해서 위임을 하면 된다. 하지만 김기사 가족은 박사장 가족이 없으면, 위임받을 일이 없어서 돈을 벌지 못한다. 즉, 부르주아에게 한 프롤레타리아는 그저 한 프롤레타리아이지만, 프롤레타리아에게 한 부르주아는 그저 하나가 아니라 유일하게 급여를 주는 존재다. 부르주아와 프롤레타리아의 기울어진 권력관계는 여기에서 야기된다. 부르주아는 돈으로 살 수 없는 시간을 아끼기 위해서 다른 사람에게 일을 위임하고, 프롤레타리아는 시간마저도 돈으로 팔려고 한다고도 볼 수 있다.


  부자와 그렇지 못한 사람으로 나뉘는 이 사회는 전자는 금수저, 후자는 흙수저라고 칭한다. 구조주의 학자 클로드 레비 스트로스(Claude Lévi-Strauss,1908~2009)는 사회를 이항대립의 구조라고 주장했다. 선이 있으면 악이 있고, 존재가 있으면 부재가 있다. 그리고 월급을 주는 자가 있으면 월급을 받는 자가 있다. 이는 필연적이다. 1등은 꼴등이 있어야 할 수 있는 것이고, 꼴등은 1등이 있어야 가능한 것처럼. 


  이 영화에서 나는 같은 공간에서 존재하지만 다른 대립되는 존재자로서의 이항대립구조를 느낄 수 있었다. 앞에서 말한 월급, 비, 집 등 수많은 요소들이 그 구조를 더욱 체감하게 만든다. 박 사장과 김 기사는 똑같은 가장이지만, 박 사장은 차를 탈 때 뒤에 탄다. 하지만 김기사는 앞에서 운전을 한다. 그리고 비가 올 때 박사장의 가족은 캠핑에서 집으로 돌아오지만, 김기사의 가족들은 그들의 직장인 박사장의 집에서 유흥을 즐기다가 급히 자신들의 집이 수해를 입을 것을 직감하고 돌아간다. (그들이 집으로 돌아간 것은 사실 박사장의 가족들이 뜻하지 않게 돌아와서 그런 것이지만, 나는 여기서 비와 집이라는 요소들의 대립을 말하고자 한다.) 비가 그치고 다음 날, 박사장의 가족들은 볕 좋은 마당에서 다송이 생일파티를 준비하지만, 김기사의 가족들은 피난 온 체육관에서 아침을 맞는다. 그것도 구호품으로 받은 옷을 입고.


  나는 이 영화에서 부자와 서민의 극단적인 다른 인생을 볼 수 있었다. 비라는 자연적인 요소는 그들에게 집에 갈 이유를 주지만 전혀 다른 상황을 제시하고, 급여라는 개념이 영화에서 박사장에게는 주는 것이지만, 김기사에게는 받아야만 하는 것이었다. 박사장은 Leverager였지만, 김기사는 Leveragee였다. 


  이 영화의 결말은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김기사의 가족들 중 기정이는 죽었고, 나머지는 살았다. 하지만 김기사는 지하 벙커에 숨어서 사는 수배범이 되었다. 김기사의 아내와 기우는 집행유예를 받고 평범하게 살고 있지만. 나는 이 영화에서 Leverager와 Leveragee만 보일뿐 다른 것은 보이지 않았다. 나는 이 글을 통해서 무언가를 전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그냥 내가 본 것을 쓴 것을 뿐이다. 철학자는 프롤레타리아인가 부르주아인가에 대해 고민하다가 이 영화가 생각났고, 그에 대해 의식의 흐름대로 끄적끄적 써본 것일 뿐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모르겠다. 지식을 만들지만, 지식으로 세상을 깨우는 지식인이 과연 양자 중 어디에 속할까? 어디에도 속할 수 없는 초월자인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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