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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경수 Jul 22. 2022

매트릭스는 현실이다.

권력을 거스르는 연어들

  어제 오랜만에 영화를 한편 봤다. 봐야지 하고 찜만 해놓고 몇 달만에 드디어 그 영화를 봤다. 그 영화는 그 유명한 '매트릭스(1999)'이다. 이 영화는 여러 방면에서 유명하다. 주인공 네오가 총알을 고개를 뒤로 젖히며 피하는 장면, 모피어스가 네오에게 빨간약과 파란 약 중에 고르라고 장면 등 영화를 굳이 보지 않아도 다들 아는 씬이 많다. 특히 이 영화는 철학의 한 분야인 인식론의 개념을 담고 있는 영화로 유명하다. 지식론 강의 때 회의주의를 강의하는 시간에 교수님께서 이 영화를 언급하셨다. 철학계의 유명한 악마 중에 하나인 데카르트의 악마에 개념을 이 영화를 본다면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나도 이 영화를 보면서 많은 철학적인 생각에 잠기게 되었다. 그리고 세상에서 철학자로 사는 것에 대해 생각하게 되는 계기가 된 영화였다. 


  이 영화는 모두가 알다시피 우리가 지각하는 세상이 모두 거짓이고, 인간은 어떤 통 안에서 전선에 연결된 채 잠을 자는 미래를 배경으로 한다. 인간은 태어나서 한 번도 잠에서 깬 적이 없으며, 꿈이 현실이라 믿고, 자신이 컴퓨터가 보내는 전기 신호에 의해 감각만 한다는 것도 전혀 알지 못한다. 하지만 모피어스와 그 동료들은 매트릭스 월드에 종속된 다른 인간들과 달랐다. 그들은 통 안에서 꿈을 꾸어지는 자가 아닌 스스로 꿈으로 들어가는 주체였다. 모피어스와 네오 그리고 그 집단들은 AI에 지배되어 가짜 세상에서 사는 인류를 구원해내는 것을 목표로 한다.  그들은 인간이 전기신호를 통해 통 속에서 가짜 감각을 느껴야 할 존재가 아니라 자신의 신체로 직접 감각하고 실존하는 존재로 만들고 싶었다. 하지만 모피어스의 동료 중에 하나는 스파이였다. 그는 자신이 요원들의 임무를 완수할 경우, 자신이 가진 실제 세상에 대한 기억을 지우고 매트릭스 월드에서 부자로 새 인생을 살게 될 것을 약속받는다. 나는 이 내러티브에서 두 가지 생각이 들었다. 첫 번째는 플라톤의 '이데아(Idea)' 이론이다. 남들은 데카르트의 악마를 이 영화에서 느낀다고 하는데 왜 나는 뜬금없이 이데아론을 꺼내냐고 궁금해 할 수도 있다. 그 이유는 플라톤의 이데아론이 세계를 '이데아'의 세계와 '동굴의 세계'

로  나누기 때문이다. '이데아의 세계'는 절대 진리의 세상이며 동굴의 세계와 반대로 동굴 밖의 세상이다. 그곳은 오감으로 느낄 수 있는 곳이 아니며, 오직 '이성'으로만 감각이 가능하다. 반대로 동굴의 세계는 오감으로 느낄 수 있는 세상이며 그곳에서 느끼는 감각은 다 거짓이다. 가짜 세상인 동굴의 세계는 '감각계'이지만 이데아의 세계는 '가지계'라고 많이 알려져 있다. 즉, 매트릭스 월드는 컴퓨터의 전기 신호로만 감각이 가능한 세상이기 때문에 나는 플라톤의 '동굴의 세계'와 같다고 영화를 보며 생각했다. 하지만 반대로 실제 세상은 "01000101010011....."과 같은 컴퓨터의 전기신호가 아닌 우리의 지각과 이성을 통해 모든 것을 알 수 있다. (매트릭스 세계는 컴퓨터 속의 가상의 시스템이기 때문에, 왜곡이 너무나도 쉽다. 그래서 갑자기 평범한 사람이 요원으로 변하는 사례도 있다. 그래서 이곳에서 어떤 개념도 혹은 이성은 무의미하다.) 


  그리고 내가 받은 가장 큰 영감은 이 영화에서 세상의 비밀을 아는 모피어스와 그의 동료들이 마치 자본주의 사회 속의 인문학자들처럼 느껴졌다. 사회와 권력층은 대중에게 끊임없이 담론을 주입해서 그들을 프롤레타리아 계급에 갇히게 만들려고 하지만, 학자들은 그 담론에 맞서 싸우는 존재들이라고 개인적으로 생각한다. 이러한 내 생각을 들으면 아마 누군가는 "넌 왜 권력을 부정적으로만 생각해?"라고 내게 비판을 할 수 있다. 내가 권력을 무지 성적으로 비판하는 것으로 보일 수 있다는 것을 나도 인정한다. 하지만 나는 권력이 마냥 부정적인 장치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권력이란 누가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서 독이 될 수도, 약이 될 수도 있는 하나의 파르마콘(Pharmakon)적인 존재다. 그래서 나는 누가 권력을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서 권력의 선악이 달라진다고 생각한다. 내가 여기서 비판하고자 하는 권력은 주체성을 소멸시키는 권력을 말하는 것이다. 


  영화 중간에 배신을 하는 동료가 나온다. 나는 그가 요원의 제안을 수락한 심정을 이해한다. 가혹한 현실에서 도피하고 고통 없는 유토피아에서 살고 싶은 욕구는 어느 인간에게나 있을 것이다. 나도 철학을 공부하면서 세상에 부딪히면 가끔 현타가 온다. 그럴 때면 배고픈 소크라테스보다 배부른 돼지가 되고 싶다. 그래서 현실을 부정하고 매트릭스에 스스로 갇히려 하는 그의 마음에 공감이 가능하다. 마치 그가 자본주의 사회에서 진정하고 싶은 것을 해야 할지 돈 때문에 갈등하는 한 사람의 모습같이 느껴졌다. 하지만 그 갈등과 고통을 이겨내는 것도 배고픈 소크라테스의 의무가 아닐까? 


  이 영화를 보면서 모피어스와 네오는 마치 거센 물살을 역행하는 연어처럼 느껴졌다. 정확히는 담론과 권력에 역행하는 존재로 느껴졌다. 어떤 부정적인 현실에도 자신의 인생의 헤게모니를 빼앗기지 않고, 위버멘쉬(Übermensch)처럼 그 모든 것에 맞서 싸우는 특별한 연어. 나도 자본주의에 굴복하지 않는, 담론을 역행하는 하나의 연어가 되고 싶다. 배부른 돼지보단 배고픈 소크라테스가 멋있지 않은가? 누군가는 권력이 만들어 놓은 안락한 곳에서 안주하지만, 누군가는 자신의 진정한 헤테로토피아(Heterotopia)를 찾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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