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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경수 Aug 17. 2022

'요즘 것들'

내가 꼰대인가 싶은 순간

  내 나이 26세. 꼰대라는 명칭과는 다소 거리가 있는 나이라고 생각된다. 오히려 꼰대들을 기피하거나 그들에게 맞서는 MZ세대라는 호칭이 오히려 더 어울릴지도 모른다. 하지만 요새 내가 꼰대인 건가 하는 의심이 자꾸 든다. 그 계기는 다름이 아닌 기술의 발전에 의한 일상생활에서의 사소한 변화들이다. 나보다 훨씬 어린 초등학생이나 10대의 행위만을 보고 내가 꼰대 인가 하는 생각이 든 것은 아니다. 나와 비슷한 연령대의 20대 혹은 30대 이상의 연령의 사람들을 보고도 내가 너무 팍팍한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인가 하는 생각이 든다. 가장 거슬리는 몇 가지 현상들만 이 글에서 다루 어보며 내 생각이 맞는지 아니면 내가 우려한 대로 내가 꼰대인 건지 알아보고자 한다. 


식사 중에 이어폰

  나는 외식을 자주 한다. 자취를 하는데 밥을 해 먹기는 귀찮아서 가능하면 밖에서 끼니를 해결한다. 끼니를 맥도날드, 버거킹 같은 패스트푸드점에서 때우거나, 아니면 김밥천국, 국밥집과 같은 식당에서 해결한다. 나는 주로 혼자 먹는데, 나를 제외한 다른 테이블들을 둘러보면 나처럼 혼자 먹는 사람도 많고, 여럿이서 식사를 하러 오는 경우도 많다. 혼밥이라는 단어가 나온 후로는 혼자 밥 먹는 게 어색하지 않은 세상이 된 것 같다. 여럿이서 같이 식사를 하는 경우는 친구끼리, 직장동료끼리 혹은 가족끼리 등등 여러 가지 방법으로 모여서 식당에 왔을 것이다. 아예 모르는 사람한테 갑자기 "같이... 밥 드실래요...?"라고 할 수도 있지만 일반적이지 않으므로 패스. 


  식사를 같이 한다는 것은 그저 음식을 같이 섭취하는 것이 아니라 그 이상의 의미를 가진다. 우선 식사를 하려면 서로 안면이 있어야 하고, 부정적인 감정이 서로 없어야 식사 약속이 성사될 가능성이 높다. 식사를 한다는 것은 육체에 필요한 영양소를 섭취하는 것인데, 이는 인간에게 필수적인 행위이며, 이러한 행위를 같이 하는 것은 중요한 일을 같이 해내는 것이라고도 볼 수 있다. 또한 식사를 한번 같이 했다 하면 어느 정도 어색함의 벽을 허물 수도 있다. 식사의 중요함 때문에 한국에서는 "밥 먹었어?", "나중에 같이 밥 한번 먹자."와 같은 안부인사가 널리 쓰이는 것이 아닐까? 아무튼 식사는 같이 밥을 먹는 것 이상으로 굉장히 사회적인 행위라고 나는 생각한다. 


  요즘에 외식할 때 자주 볼 수 있는 풍경이 하나 있다. 나는 그 모습이 이성으로도 감성으로도 이해가 가지 않는다. 그것은 밥 먹으면서 이어폰을 착용하는 것이다. 밥 먹으면서 이어폰 쓰는 게 무슨 문제인가?라고 반문하는 사람도 있을 텐데, 나는 혼밥의 경우에는 이어폰을 끼던 말던 상관이 없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적어도 누군가와 같이 밥을 먹을 때에는 이어폰을 빼고 밥을 먹어야 하지 않을까? 


  나의 윤리적 관점에서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행위와 남에게 악영향(부정적인 파급력)을 주지 않는 행위는 모두 용인된다. 다른 사람에게 직접적인 피해를 주지 않거나, 타인들에게 잘못된 가치관을 가지게 하지 않는다면 다 괜찮은 행위라고 나는 생각한다. 하지만 가족과 식사 중에 혼자 이어폰으로 양쪽 귀를 다 막은 어린아이를 보면  과연 저게 맞는 것일까? 하는 생각이 든다. 부모님이 허락을 했고, 본인도 불편하지 않다면 그것은 가족이라는 집단 안에서 윤리에 어긋나지 않는 행위일 것이다. 하지만 식사 중에 귀를 아예 막고 식사를 한다는 것은 식사의 부가적인 기능이자 암묵적인 약속인 대화의 여지를 완전히 닫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이 왜 문제냐고? 내가 보기에 가족끼리 가족 가깝고, 화목한 순간은 아무래도 식사시간일 것이다. 여행은 가끔이지만, 식사는 거의 매일이며, 심지어 세 번 일수도 있다. 이렇게 가장 가까운 시간에 이어폰을 낀다는 것은 "당신과 거리를 두겠습니다."라고 선언하는 것과 같지 않을까? 밥 먹을 때도 대화를 거부한다면, 도대체 언제 대화하겠다는 걸까? 


  앞에서 부정적인 파급력이라는 단어를 사용했다. 이 단어를 사용한 의도는 한 개인의 행동이 누군가에게 미칠 잠재력에 대해 설명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즉, 어떤 유아가 만약에 가족과 식사 중에 이어폰을 착용한 초등학생을 보면 그에 영향을 받을 것이라는 것이다. 가정교육이 잘 이루어진다면, 그것이 식사예절에 맞지 않는다는 것을 인지하겠지만, 그렇지 않을 경우에는 그 행위가 잘못된 점이 없다고 생각하고 그것이 하나의 밈(meme)으로써 받아들이게 될 것이다. 중국에서 발발한 코로나19가 전 세계에 퍼진 것처럼 이러한 잘못된 식습관 또한 전 세계에 퍼질 수 있지 않을까? 

  

오프 문화

  나는 오프라는 단어가 처음에 뭔가 했다. 간호사들이 근무를 오프(off)와 듀티(duty)로 나누는 것은 봤지만, 인터넷에서의 오프라는 단어는 도저히 감이 오질 않았다. 유저가 접속하지 않은 오프라인 상태를 줄여서 오프라고 하나? 하는 추측만 가지고 있었는데, 누가 말해주기를 오프는 온라인에서 알게 된 사람을 오프라인으로 만나는 것이라 한다. 나는 현실세계에서도 친구를 많이 만나지 않아서 오프라는 단어를 알게 되고 충격을 받았다. 물론 나도 인터넷으로 사람을 만나본 적이 있다. 당근 마켓, 중고 나라와 같은 중고 거래와 밴드를 하고 싶은데 주변에 인물이 없어서 온라인상으로 밴드를 찾아서 가입한 적이 있다. 인터넷이라는 도구가 있었기 때문에, 나는 필요 없는 물건들을 저렴하게 구매하고, 판매할 수 있었고, 다행히 좋은 사람들을 만나서 같이 음악을 했다. 근데 왜 오프에 충격을 받았냐고 물어볼 수 있다. 내가 충격받은 오프는 연애를 목적으로 하는 오프다. 사랑은 인간의 자연스럽고 긍정적인 감정이다. 삶의 원동력이 될 수 있으며, 세상을 아름답게 보게 하는 계기가 될 수도 있다. 하지만 나는 인터넷으로 사랑을 찾는 것은 좀 아닌 것 같다. 오프라인으로 만나기 전에 그 사람의 얼굴도 모르고, 심지어 성별마저도 진짜인지 알 수 없고, 모든 정보가 거짓일 수도 있는데 과연 그 사람을 사랑할 수 있을까? 온라인에서는 탕웨이 같은 프로필 사진을 올리지만, 실제로는 정반대일 수도 있지 않은가? 또한 범죄에 노출될 가능성 또한 존재한다. 영화 '박화영'에서 일진 무리들이 성매매를 미끼로 어른들을 유인해서 금품을 갈취하는데, 이는 성매매뿐만 아니라 오프로 인한 만남에서도 충분히 가능하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만약에 '오프'를 하기로 하기로 했는데, 인적이 드문 곳으로 오라 하고, 차에 태워준다고 해서 따라갔다가 큰 피해를 입을 가능성 또한 있음을 알아야 한다. 또한 이러한 인터넷으로 인한 가볍고, 편한 만남은 인간 사이의 진정한 관계를 맺는 것을 소멸시키는 첫걸음이 되지 않을까? 인문학을 공부하는 사람으로서 나는 인터넷으로 연애 상대를 찾는 게 이해가 가지 않는다. 내가 너무 꽉 막히고, 변화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걸까? 물론 좋은 만남이 있을 수도 있다. 다만 그 확률은 아주 낮을 것이다. 인터넷으로 사랑을 찾을 정도라면 굉장히 외로운 사람일 것이다. 나는 그런 사람에게 이성 말고 사람을 만나라고 권할 것 같다. 인터넷으로 가입한 보드게임 모임이나 밴드에서 사람을 사귀고, 그 사람들과의 관계 지속을 하다 보면 좋은 인연을 만날 수도 있지 않을까? 아무튼 나는 연애 목적의 오프를 부정적으로 생각한다.


저감성 고비용 소비습관

  저감성 고비용 소비습관이야 말로 정말 큰 문제다. 대체 그놈의 감성이 뭐길래 아이폰이 출시될 때마다 사고, 먹으면 소화되는 빙수를 7만 원이나 주고 그것도 줄 서서 먹는 걸까? 물질이 그 본질(기능)에 충실해야 올바른 물질인 것처럼 소비 또한 본질을 가지고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휴대폰은 전화 잘되고, 인터넷 잘되고, 게임이 잘 돌아가는 등 그것의 이용자의 필요 용도에 해를 끼치지 않는다면 그 역할을 충분히 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요즘 MZ세대뿐만 아니라 수많은 사람들이 그 본질적인 기능의 필요성이나 고장, 부재 등의 이유가 아닌 동조의 요인으로 소비를 한다. 애플망고 빙수는 애플망고 맛이 나면 되는 거고, 자동차는 안전하게 목적지까지 운행할 수 있으면 되는 거다. 하지만 많은 대중들은 자신의 분수에 맞지 않게 외제차를 사거나 과하게 빚을 지면서 고급 아파트에 산다. 경제적으로 여유가 돼서 70만 원짜리 빙수를 먹고, 연비 3km/l인 포르쉐를 타는 건 문제가 되지 않는다. 하지만 월급 200만 원 받는 사람들이 그러면 문제가 되지 않을까? 


  나의 걱정에 누군가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 "그건 그 사람 자유지." 맞다. 그건 그 사람의 자유다. 그 사람이 행복하면 올바른 행위다. 하지만 그렇게 돈을 물 쓰듯이 쓰는 사람이 과연 지속적으로 행복할까? 그 행복은 순간이 아닐까? 오히려 갈수록 더 큰 쾌락만을 추구하고, 더 큰 역치를 만족시키기 위해서 더 고가의 소비를 할 것이다. 과연 욜로를 주장하며 돈을 펑펑 쓰는 사람과 미래를 위해 자신의 소득에 맞는 소비를 하는 사람 중에 누가 나중에 웃을 수 있을까? 사실 물질은 도구이자 허상이다. 100만 원가량의 스마트폰을 쓰는 것보다 150만 원가량의 스마트폰을 쓴다고 1.5배 좋은 것은 아니고, 1.5배 더 연락이 많이 오는 것도 아니다. 그저 전화만 하는 사람에게는 100만 원짜리나 150만 원짜리나 똑같은 물건이다. 근데 굳이 형편에 안 맞게 돈을 더 주고 똑같은 기능을 수행하는 물건을 살까? 


결론

  내가 이상한 걸까? 거대한 구조의 변화를 내가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일까? 아님 내가 너무 보수적으로 인문학적 가치를 고수하는 것인가? 사실 사람의 행위는 타자에게 피해를 주지 않고, 본인이 행복하면 다 용인된다. 따라서 타자와 식사를 할 때 이어폰을 끼고, 인터넷으로 이성을 만나고, 저감성 고비용 소비를 하는 게 누군가에게 피해를 주지 않고, 본인이 행복하다면 전혀 문제가 되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과연 그 행위들이 본인에게 그저 긍정적인 영향만 준다고는 못하겠다. 나는 앞의 세 가지 행위들이 인간과 사회를 망친다고 본다. 그렇다면 변화의 파도일지도 모르는 이것들을 한심하게 보는 나는 보수적인 꼰대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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