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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경수 Aug 21. 2022

헤어질 결심

모두가 헤어지는 영화

해준을 바라보는 서래

  헤어질 결심. 개봉 전에는 딱히 관심이 없는 영화였다. 그때는 그냥 "아 그런 영화가 개봉하는구나." 싶었다. 하지만 박찬욱 감독의 영화라는 사실이 나의 관심을 끌었고, 탕웨이라는 배우가 나를 유혹했다. 긴 러닝타임 때문에 난 영화감상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영화를 보더라도 넷플릭스나 왓챠로 틀어놓고 핸드폰으로 딴짓을 한다. 그래서 난 영화관보다 집에서 캐주얼하게 보는 것을 선호한다. 하지만 이 영화는 영화관에 직접 가서 관람했다. 코시국때문에 영화관을 안 간지도 3년이 넘어서 한번 가보고 싶기도 했고, 무엇보다 이 영화를 빨리 보고 싶었다. 그러기 위해선 영화관에서 관람하는 게 최고의 선택지였다. 


미장센(Mise-en-Scène)

  박찬욱 감독은 내가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영화감독이다. 그의 작품을 다 보지는 않았지만, 몇 가지 작품을 수십 번 돌려본 것 같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박 감독의 영화는 "올드보이(2003)", "친절한 금자씨(2005)" 그리고 "복수는 나의 것(2002)"이다. 헤어질 결심을 보기 전에는 개인적으로 올드보이가 인생 영화였는데, 이제는 헤어질 결심이 내 최애 영화가 될 것 같다. 올드보이라는 영화는 나에게 지독하게 고독하고, 미스터리 한 영화였다. 그래서 누군가가 왜 그 영화가 좋냐고 물어본다면 나는 "그냥"이라고 밖에 할 수 없었다. 난 그냥 최민식 배우의 고독한 연기와 유지태 배우의 그 복수 플롯이 좋고, 보라색과 빨간색으로 물든 영화의 미장센이 좋아서 그 영화를 몇 번이고 다시 봤다. 나는 올드보이라는 영화에서의 미적 요소들이 마치 벨라스케스가 피리 부는 소년을 그린 회화처럼 느껴졌다. 난 소년의 표정에서 오대수의 고독함을 느꼈고, 벽도 아니고, 자연도 아닌 소년의 뒤의 배경을 보고서 이 영화의 미스터리 한 플롯이 생각났다. 그래서 난 박찬욱 감독의 영화 올드보이가 벨라스케스의 회화처럼 느껴졌다.

마네의 회화와 에드워드 호퍼의 회화

  올드보이가 마네의 회화였다면 이번에 본 헤어질 결심은 에드워드 호퍼의 회화를 보는 것 같았다. 에드워드 호퍼의 훔쳐보는 듯한 구도는 마치 서래를 몰래 훔쳐보는 해준을, 해준을 바라보는 서래를 생각나게 한다. 뿐만 아니라 영화에서 서래는 상황에 따라 초록색과 빨간색 옷을 주로 입었는데, 그 에메랄드 빛 색감이 나는 호퍼의 회화에서 느껴지는 색감과 비슷하게 느껴졌다. 나는 호퍼의 회화의 특징이 훔쳐보는 구도와 사색에 잠긴 표정 그리고 그 특유의 색감이라고 생각한다. 에드워드 호퍼의 "밤샘하는 사람들"이야말로 그의 감성을 잘 살린 작품이라 생각하고, 개인적으로 헤어질 결심이라는 영화를 현존하는 회화에 치환할 때 이 그림이 가장 적합하지 않을까 하는 느낌이 든다. 


아래부터는 결말을 포함하기 때문에 "스포주의"


내용

  난 이 영화의 제목을 참 잘 지었다고 생각한다. 이 영화에서 모든 등장인물들은 헤어지거나 헤어질 결심을 한다. 해준은 서래와 헤어질 결심을 하고, 해준의 부인인 정안은 해준과 헤어질 결심을 하고, 서래는 해준 그리고 세상과 헤어질 결심을 하고, 홍산오는 자살을 하며 그가 사랑하는 여자와 헤어질 결심을 하고, 서래의 두 번째 남편인 임호신은 자신이 투자자에게 죽을 것을 알고 헤어질 결심을 한다. 


  이 영화에서 제목이 암시하는 내용도 굉장히 인상적이지만, 나는 다른 의미에서 이 영화의 소름 돋는 면을 찾을 수 있었다. 이 영화에서 여러 건의 살인 사건이 일어나고, 여러 사람이 죽는다. 서래의 어머니, 서래의 첫 남편 기도수, 범죄자 홍산오, 서래의 두 번째 남편 임호신, 사철성의 어머니가 죽는다. 이 영화에서만 무려 6명이나 되는 사람이 죽은 셈이다. 6명이 죽었다면 뭔가 미스터리 범죄 영화 같은 느낌을 주는 게 보통이지만, 이 영화는 로맨스의 느낌을 너무 강하게 줘서 범죄에 대한 우리의 감각을 마비시킨다. 자기 어머니, 첫 번째 남편 그리고 사철성의 어머니를 죽인 송서래와 경찰 장해준의 로맨스가 너무 몰입하게 되어 관객의 입장에서 사람이 죽은 것은 안중에 들어오지 않았다. 오히려 살인을 저지른 서래의 입장에 몰입하게 되고, 해준과 잘 되기를 바라게 되었다. 마치 스톡홀름 신드롬이 일어난 것처럼. 


  탕웨이라는 배우의 팜므파탈에 해준이 아닌 나까지 빠지게 되고, 몰입하게 되었다. 과거에 탕웨이가 출연한 영화 "색, 계"에서 느낄 수 있는 탕웨이의 팜므파탈과 헤어질 결심에서 느낄 수 있는 팜므파탈은 너무나 달랐다. 전자에서는 강렬한 베드신과 아름다운 미모로 관객을 유혹했다면, 후자에서는 그저 말투, 표정과 같은 너무나도 보통적인 요소들로 유혹했다. 


  과연 해준의 헤어질 결심은 이러한 팜므파탈 앞에서 무릎을 꿇지 않을 수 있었을까? 마지막에 바다에서 서래를 애타게 찾는 해준을 보면 그의 헤어질 결심은 서래에게 백기를 흔드는 것 같다. 


감상 후

   다양한 형태로 헤어지는 상황이 나오는 이 영화를 보고, 이별에 대해 생각해보게 되었다. 지금까지 내가 헤어진 사람들, 앞으로 헤어지게 될 사람들, 아직 만나진 않았지만 헤어지게 될 누군가에 대해서. 이별의 고통을 모르는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세상을 살다 보면 누구나 이별을 할 수밖에 없고, 피할 수 없다. 그 대상은 부모님일 수도, 친구일 수도, 연인일 수도, 그 외의 인물일 수도 있다. 그 누군가를 잃었을 때 상실감은 굉장히 클 것이다. 마치 서래의 범행을 알게 된 해준처럼. 해준은 왜 서래의 범행을 알게 되고 그와 헤어질 결심을 했을 때, 고통스러웠을까? 반면에 서래는 왜 남편 기도수가 죽어도 고통스러워하지 않았을까? 


  그 이유는 준비되지 않은 고통과 준비된 고통이기 때문이다. 해준은 서래가 용의 선상에서 벗어나게 되자 모든 경계를 풀고, 그를 사랑한다. 하지만 그 사랑하는 사람의 범행 사실을 알게 된다. 해준의 경우는 예상치 못한 고통을 겪게 되어 그 고통이 클 것이다. 반면에 서래는 남편을 잃었음에도 차분하고, 고통이 적어 보인다. 그 이유는 남편을 사랑하지 않아서 일수도 있지만, 나의 관점에서 그녀에게 감정의 동요가 없었던 이유는 그 모든 과정을 미리 알고 준비했기 때문이다. 


  인간의 삶이 고통스러운 이유는 해준처럼 예상치 못한 시련을 겪기 때문이 아닐까? 우리는 살면서 많은 고통을 마주한다. 시험에 낙방하거나 사람을 잃거나, 금전적인 이유 등 여러 이유로 감정이 동요된다. 그 이유는 아마 준비하지 못한 시련이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는 수많은 시련을 겪을 수 있다. 그 시련은 우리가 미리 예상한 것일 수도 있지만, 예상치 못한 혹은 생각조차 할 수 없을 어처구니없는 일일 수도 있다. 만약 그 시련이 과거부터 예상해온 일이라면 결과와 상관없이 당황하지 않을 것이다. 그 시련을 예상하고 준비한 사람은 잘 대처할 것이고, 예상하고도 준비하지 않은 사람은 그저 그 운명을 받아들일 것이다. 


  하지만 코로나와 같이 예상치 못한 재난이 닥치면 인간은 패닉에 빠진다. 앞만 보고 장애물을 피하면 잘 가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으나, 장애물은 측면에서도 올 수 있고, 후면에서도 올 수 있다. 심지어 아래나 위에서도 올 수 있다. 그렇다면 내 주장은 우리가 잘 가려면 사방팔방을 다 보고 신중하게 가야 한다는 주장일까? 그건 아니다. 사방팔방을 다 보며 걷는 것은 불가능하다. 우리의 눈은 정면만을 응시하고, 사방을 다 돌아보면서 걷는다면 걷는 것 자체가 큰 부담이 될 것이다. 우리는 세상에 자신을 기투하지만 그건 모든 것을 고려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저 일부만 보고 기투한 것이다. 근데 만약에 세상에 모든 것을 고려하고 기투한다면 아무도 기투하지 못할 것이다. 


  모든 것을 다 계산하고 공리를 따져 기투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숨도 못 쉴 것이다. 숨 쉴 때 필요한 것은 산소인데, 대기 중에는 산소만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내가 하고 싶은 말이 뭐냐고? 그저 기투하고 운명을 받아들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가 예상할 수 있는 재난을 받아들일 때도 굉장히 고통스럽다. 또한 예상치 못한 재난을 받아들인 다면 그 이상으로 고통스러울 것이다. 세상 사는 것 자체가 불안의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는데, 어떻게 고통과 불안을 배제하며 살겠는가? 인간이 예상치 못한 사건을 당면하고, 그것을 없애야 한다는 강박에 의해 고통스러운 것이라면, 그냥 그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평정을 유지할 수 있다면 고통스럽지 않지 않을까? 결론은 나도 스토아학파처럼 그냥 운명을 받아들일 줄 아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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