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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경수 Aug 13. 2022

Serenade for strings

현을 위한 세레나데

비 오는 춘천 거리

  나는 산책과 음악을 좋아한다. 그래서 평소에 혼자서 걸을 경우에 음악을 들으며 걷는다. 난 음악 장르를 크게 가리지 않는다. 오히려 너무 극에서 극으로 플레이리스트가 매일 바뀐다. 이유 없이 어느 날은 힙합을 듣고, 어느 날은 메탈을 듣고, 클래식을 듣고, 레퀴엠을 듣고, 탱고, 보사노바, 재즈 등 나는 다양한 음악을 듣는다. 유튜브 프리미엄을 음악을 들은 이래로는 내가 만들어 놓은 플레이리스트 보다 유튜브가 큐레이션 해주는 음악을 더 듣게 되었다. 그래서 내가 모르던 다양한 음악도 알게 됐고, 다양하게 듣게 된 거 같다. 특히 요즘엔 비슷한 분위기의 곡들을 모아서 만든 플레이리스트를 하나의 영상으로 업로드하는 유튜버들도 많다. 그래서 음악을 찾아다닐 필요 없이 비슷한 분위기의 곡들을 찾기가 쉬우며, 음악을 일일이 다 플레이리스트에 넣는 수고를 하지 않아도 좋은 음악을 들을 수 있다. 나는 이런 하나의 영상을 만들어진 플레이리스트를 애용하는데, 이 영상들 덕에 좋은 노래들을 더 많이 발견한 것 같다. 그리고 무엇보다 영상 하나를 재생하면 1시간 이상은 가기 때문에 선곡의 귀찮음을 나름대로 레버리지 할 수 있었다. 


  요즘엔 클래식 플레이리스트를 주로 듣는다. 독서를 하거나 논문을 쓸 때는 웬만하면 음악을 듣지 않는데, 독서와 논문에만 매달리는 요즘은 가사가 없는 클래식 음악을 들으며 작업들을 한다. 이 글을 쓰는 지금도 드보르작의 음악을 듣고 있다. 내가 자주 듣는 플레이리스트는 "This playlist makes you feel like a 19th century villain.", "A playlist for a 19th century villain plotting their revenge." 등이 있다. 악당을 위한 플레이리스트를 듣는다고 하면 굉장히 유치하거나 중2병스러울 수 있다. 하지만 이 플레이리스트의 장엄한 분위기를 느낀다면 그런 생각을 접게 될 것이다. 아무튼 요즘엔 이런 클래식 음악을 들으며 독서와 공부를 한다. 그리고 글을 쓸 때도 음악은 나에게 에센셜 하다.


  토요일, 일요일, 공휴일은 일부러 도서관에 가지 않는다. 나는 평일에는 하루를 도서관에서 보내고, 주말이나 공휴일에는 카페에서 보낸다. 주로 독서나 글쓰기를 하며 시간을 보낸다. 물론 주말이나 공휴일도 도서관에서 책을 읽을 수 있지만, 나는 일부러 가지 않는다. 그 이유는 일주일 7일을 매일 같은 곳에서 같은 행위만 하면 내가 너무 숨이 막힐 것 같아서 이다. 나는 틀에 박히면서 틀에 박히는 것을 싫어한다. 이게 뭔 개소리냐면 나는 내가 세워놓은 루틴을 하는 틀에 박힌 삶을 일정한 장소가 아닌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하는 것을 좋아한다. 오늘 스타벅스에서 책을 읽었다면, 내일은 투썸플레이스에서 책을 읽는 식으로 나는 한 장소에 고정되는 것보다 이동하는 것을 선호한다. 그래서 토요일인 오늘은 그동안 가보지 않은 카페에서 조지 오웰의 '1984'와 데일 카네기의 '인간관계론'을 읽었다. 


  이른 저녁을 먹고 책들을 챙겨서 집에서 나섰다. 혹시 모르니 우산도 가방에 넣었다. 평소에 밤에만 걸어 다니는 길을 처음으로 해가 떴을 때 걸었다. 뭔가 새로웠다. 그동안 밤에 다녔기 때문에 교육청의 새로운 청사가 어떤 색의 외관 인지도 몰랐으며, 가게들이 열려있는 것도 낯설었다. 하지만 내가 듣는 음악은 늘 듣던 플레이리스트였다. 그러다 보니 늘 가봐야겠다고 마음속으로만 외쳤던 카페에 도착했고, 아이스 아메리카노와 티라미수를 주문했다. 다른 카페에서 주문하면 만원은 기본으로 넘겼는데, 그곳에서는 8,200원 정도였다. 자주 애용해야겠다. 2층으로 올라가니 재즈 음악이 흘러나왔다. 무슨 곡인지는 모르지만 내가 좋아하는 스타일의 곡이어서 오늘은 이어폰을 꽂지 않고, 매장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을 들으며 독서를 했다. 재즈를 들으며 3시간 동안 쉼 없이 책을 읽었다. 분명 6시 반 전에 도착했는데, 시계를 보니 9시 반이 되려고 하는 참이었다. 10시 마감인 카페에서 뭔가 좀 더 하고 싶어서 어플로 프랑스어를 좀 공부하다가 9시 40분쯤에 나온 것 같다. 


  우산을 가져오길 잘했다. 밖에는 비가 주룩주룩 내리고 있었다. 밖은 내가 집에서 나왔을 때와는 다르게 어두웠으며, 날씨까지 바뀌었다. 그래서 드보르작의 "Serenade for strings in E major"를 반복 재생으로 틀고 집으로 향했다. 이 음악은 최근에 내가 빠진 곡인데, 빌런 뭐시기 플레이리스트를 듣다가 이 곡은 너무 좋아서 직접 찾았다. 귀찮아서 음악을 안 찾아 듣고, 다른 사람이 큐레이션 해놓은 곡을 듣는 사람이지만, 이 곡만큼은 내가 직접 찾아서 매일 듣는다. 웅장한 구성, 뭔가 고독하면서 슬픈 단조(minor)느낌이 나는 선율 때문일까? 나는 이 곡을 굉장히 좋아하게 되었다. 


  드보르작의 곡을 들으며 마냥 걷는 중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나는 이 곡을 왜 좋아하지?" 예전의 나였다면 "그냥 ㅡㅡ"이라고 대답했겠지만, 지금의 나는 이렇게 대답할 것 같다. "그러게?" 왜 우리는 음악을 미술을 그리고 예술을 사랑할까? 왜 피 튀기는 티켓팅이라는 경쟁을 하고, 비용을 지불하면서 남의 예술을 감상할까? 공연은 유튜브로도 볼 수 있고, 그림은 구글에 치면 해상도 좋게 볼 수 있고, 파일로 소장도 가능하다. 근데 왜 나는 굳이 비싼 돈을 주고 그림을 강남에 가고, 밴드의 공연을 보러 홍대에 갈까? 


  전에 이런 글을 쓴 적이 있다. 페르소나에 지친 대중들이 자신의 목소릴 내고 싶은 욕구가 파레시아의 역할을 하는 예술가를 동경하게 만든다는 내용이었던 것 같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예술이 감정의 배설과 정화의 역할을 한다고 말했는데, 그렇다면 나는 남의 배설물을 보러 돈까지 내며 찾아가는 것일까? 다시 파레시아로 돌아가서 왜 인간은 자신의 목소리를 내고 싶어 할까? 아까 읽은 카네기의 책에서는 모든 인간은 칭찬받고 싶어 하며, 인정받고 싶어 한다고 했다. 이 점을 고려해보면 그런 욕구는 본능이며 그로 인해서 대중이 예술을 동경하는 것은 아닐까? 미술은 감정의 공간적 표현이고, 음악은 영감의 시간적 표현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어떤 것이 더 훌륭하냐는 예술에 맞지 않는 표현이고, 어느 것이 더 내게 와닿느냐가 맞는 표현이라 생각한다. 만약 내가 어떤 예술작품을 다른 예술작품과 비교하면서 흔한 말로 내리 까면 그건 작가의 감성을 비판하는 것이 될 것이다. 과연 나라는 인간은 타자의 감성, 표현을 함부로 평가할 가치가 있는가? 나는 그럴 자격이 없다.


  그래서 예술이 뭐고 우리는 왜 예술을 좋아할까? 대체 작품의 어떤 요소가 우리를 감동시키고, 사랑에 빠지게 할까? 그저 뇌의 전기신호에 불과한 일시적인 감정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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