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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경수 Sep 14. 2022

생명 정치

출산율, 건강검진 그리고 자살예방

구글 출처

  지난 추석 연휴 일요일이 내 생일이었다. 나에게 생일은 참 오묘한 날이다. 생일이라는 날에는 그냥 존재한다는 이유로 축하를 받아서 좋기도 하지만, 나이를 먹는 것이 가장 체감되는 날이다. 난 뭐했다고 26살일까... 생일 축하한다는 말을 듣고서 나는 삶에 대해 회의적인 질문도 던지고, 본질적인 질문도 던지는 철학도로써 왜 사람들은 삶을 소중히 여기는지 궁금해졌다. 왜 정부는 출산을 장려하고, 기업은 왜 직원들의 건강에 신경을 써서 건강검진이라는 것을 시켜줄까? 그리고 왜 개인의 선택인 자살은 막는 것일까? 나는 자유지상주의적 색채가 강한 사람이라 그런지,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죽음에 대해선 회의적으로 보지 않고, 그 선택을 존중한다. 만약 가족도 없고, 친구도 없고, 직장도 없고, 연체될 요금도 전혀 없는 즉, 세상과 완전히 단절되어서 사라져도 아무도 모르고, 세상이 굴러가는데 지장을 주지 않는 누군가가 죽는 다면, 아무도 슬퍼하지 않고, 그 죽음에 관심을 가지지 않을 것이다. 미디어들은 만약 그런 사례를 발견한다면 그의 죽음의 원인도 모른 채 삶을 비관하다가 자살한 것으로 보도할 것이다. 그런 기사들이 잘 팔리기 때문이기도 하고, '인간적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아마 마지막 멘트는 힘들거나 극단적 선택이 생각날 경우에 나라에서 운영하는 콜센터에 전화해서 무료상담을 받을 것을 권하는 것이지 않을까 추측한다. 


출산율

  2022년 9월 13일 작금의 출산율은 가임여성 1명당 0.808명으로 사상 최저치를 기록하고 있다. 과거에는 너무 많이 낳아서 하나 혹은 둘만 낳아서 살라고 캠페인까지 한 대한민국이 어쩌다 이렇게 되었을까? 심지어 서울 반포동 일대의 주공아파트를 청약할 당시에는 정관수술을 한 가정에게 가산점을 주기도 했었다. 과거에는 왜 많이 낳는다고 뭐라 하고, 지금은 안 낳는다고 뭐라 할까? 어차피 개인의 선택 아닌가? 누군가는 아이가 많아서 시끌벅적한 가정을 좋아할 수도 있고, 누군가는 아이 없이 배우자와 단 둘이 사는 가정을 원할 수도 있다. 그런데 왜 과거의 대한민국과 작금의 대한민국은 출산에 관심이 많을까? 


  출산 자체에도 비용이 많이 들지만, 출산 후 자녀를 양육할 때도 많은 비용이 든다. 학비, 학원비, 식비, 품위유지비 등 수많은 명목으로 자녀에게 지출해야 할 이유가 많다. 그래서 요즘 세대는 아이를 낳고 기르는 수고와 비용이 부담되어 출산을 안 하고 싶어 한다. 자녀를 키운다는 건 물론 멋진 일이다. 그 아이가 나중에 과학자가 되어 노벨상을 받을 수도 있고, 철학자가 되어 강단에서 강의를 할 수도 있고, 대기업에서 많은 봉급을 받으며 폼나게 살 수도 있다. 하지만 이미 인생을 살아본 2030들은 평범한 삶조차 영위하기 어렵다는 것을 안다. 현재 자신의 인생도 힘들게 유지하는데, 아이가 태어난다면 얼마나 더 힘들까? 하는 걱정 또한 출산을 꺼려하게 만드는 요인 중에 하나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부는 출산을 장려한다. 출산율이 낮아진다는 것은 인구의 고령화가 가속화된다는 것과 인구의 감소, 생산량 감소를 의미한다. 의학의 발달로 평균 수명은 크게 늘었지만, 아이는 태어나지 않는다. 그래서 태어나는 아이의 수보다 정년퇴직하는 노인이 더 많다. 이는 일본과 한국에서 큰 문제로 여겨지고 있다. 먹여 살려야 하는 사람은 늘어만 가는데, 나중에 먹여 살려줄 사람이 나타나지 않는다. 그는 나중에 개인에게도 크게 체감될 문제가 될 것이다. 현재 대한민구의 초등학교의 학급 수와 한 학급의 아이 수를 과거와 비교하면서 봐도 체감이 크게 될 것이다. 


  그래서 정부는 미래에 이 나라를 이끌어갈 청년이 없을까 봐 걱정한다. 그래서 국민들이 아이를 낳기를 원하며, 만약 낳으면 인센티브를 부여한다. 출산율 감소에 대해서는 누구나 문제라고 느낄 것이다. 극단적으로 말해서 한민족이 멸족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왜 출산율이 높았을 때는 적게 낳으라고 권하였을까? 


건강검진

  건강검진은 나라에서도 무료로 해주고, 다니는 기업에서도 해준다. 왜 나라와 기업에서 건강까지 신경 써줄까? 그 이유는 국민과 피고용자가 하나의 생산자로써 생산량에 기여하기 때문이다. 국가는 국민에게 복지와 사회간접자본 그리고 공교육과 같은 혜택을 누리게 해 주고, 여러 위험으로부터 보호해준다. 그리고 그러한 혜택과 보호는 우리가 낸 세금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그래서 1인당 국내총생산(GDP)이 높은 국가일수록 양질의 복지와 혜택을 받는다. 


  우리는 현재 자본주의 이데올로기 속에서 살고 있다. 이 말은 최소 인풋(input)으로 최고 아웃풋(output)을 뽑아내는 것이 에피스테메(episteme)라고 해석할 수도 있다. 그래서 국가와 기업은 구성원들의 건강까지 신경 쓴다. 그 이유는 건강해야지 더 좋은 결과물을 낼 수 있기 때문이 아닐까? 병이 있다면 잠재적으로 일을 그만둘 가능성이 생기고, 근로자의 개인 업무 능력 또한 영향을 받을 수 있다. 고로 국가, 기업과 같은 거대 조직들은 마치 자동차 엔진오일을 주기적으로 교체하는 것 그리고 점검을 받는 것처럼, 구성원들의 건강을 하나의 부품으로써 신경 쓰는 것이 아닐까? 


자살예방

  자살이 부정적이라는 사실은 자명하다. 스스로 목숨을 끊는 행위는 주변인들에게 큰 슬픔을 주기 때문이다. 하지만 앞에서 다룬 것처럼 남에게 전혀 피해를 주지 않는 자살이라면 어떨까? 극단적 선택을 한 그에게는 슬퍼해줄 누군가가 존재하지 않는다. 그의 죽음으로 업무에 지장을 받는 사람도 없다. 그가 죽어도 월세, 전기세, 수도세 같은 공과금은 연체되지 않는다. 그에겐 죽음으로 인해 참석하지 못할 약속도 없다. 이처럼 사회와 완전히 단절되었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자신이 원해서 자살한다면 그 경우도 과연 부정적이라고 봐야 할까? 이 죽음은 아무에게도 피해를 주지 않았다. 누구에게 심리적인 피해, 물리적인 피해 그리고 금전적인 피해까지 주지 않았다. 당사자는 결국 자신이 원하던 방식으로 세상을 떠났다. 과연 그 행위를 도덕적으로 옳지 않다고만 주장해야 할까? 


  국가는 자살에 대해 부정적인 담론을 형성하고, 그 행위를 예방하려 노력한다. 왜 그럴까? 인도적인 차원도 있고, 윤리적인 차원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정치적인 측면에서는 어떨까? 제레미 벤담과 같은 양적 공리주의 철학자들은 다수의 이익을 위한 개인의 자살이라면 옳은 행위라고 할 것이다. 하지만 칸트와 같은 형식주의자들은 반대할 것이다. 자살이라는 행위는 자신을 목적이 아닌 수단으로 삼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두 거장의 의견 모두 그들의 입장에서는 합당하겠지만, 나는 그렇지 않다. 그래서 다른 이유를 찾아보려고 한다.


  내 뇌피셜로 정치적인 이유를 말하자면, 그것은 국가의 생산자를 하나 잃는 것이기 때문이다. 기업은 직원이 불미스러운 일로 근무를 지속할 수 없을 경우, 다른 직원을 고용하면 된다. 하지만, 국가의 한 국민이 영원히 사라지는 것은 다르다. 기업에서의 직원과는 다르게, 새로 모집할 수 없다. 좀 냉정하게 말해서 한 국민의 부재는 티오를 만들지 않는다는 이야기다. 한 개인이 부재했다고 외국에서 그 대체품을 찾는다면 그 국가는 국민을 그저 수단으로만 대하는 것으로 보일 것이다. 그래서 국가는 현존하는 국민들의 존재를 중요시 여긴다. 그들의 존재는 개인으로써는 주체이지만, 거시적으로 국가적으로 보면 그들은 생산자이다. 그래서 국가는 생산자를 잃지 않기 위해서 그들의 이탈을 방지하는 차원에서 자살을 막고자 한다. 


  베르테르 효과(Werther effect)는 사회적으로 영향력 있는 사람이 자살을 할 경우 그에 동조해서 대중들이 자살을 하는 현상이다. 베르테르 효과는 연예인의 자살뿐 아니라 지인의 자살에서도 일어날 수 있다. 많이 의지하던 사람에 의해서, 너무나 사랑한 연인에 의해서, 아주 존경한 학자의 죽음에 의해서도 일어날 수 있다. 한 주체의 자살은 마치 도미노처럼 다른 자살을 일으킬 수 있다. 그 죽음은 누구의 죽음 일지 아무도 예측 못한다. 그래서 국가는 자살을 막는 것이 아닐까? 


  더 정확히 말해서 국가는 국가를 위해서 국민의 건강과 출산을 증진하고 죽음을 막는 것이 아닐까? 그저 국민을 위해서 복지라 생각했던 것들이 어쩌면 권력의 작용은 아닐까? 어쩌면 돈을 많이 벌어야 한다는 욕망마저 권력층에게서 전이된 욕망이 아닐까? 마치 라캉의 정신분석학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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