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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경수 Sep 17. 2022

파르메니데스(Parmenides)

있는 건 있고, 없는 건 없다.

Parmenides (B.C 515~460?) 

  지난번 글에서 다룬 헤라클레이토스는 모든 것은 변하며 영원한 것은 없다고 했다. 하지만 이번에 이야기할 파르메니데스는 반대로 세상에 변화와 운동은 없다고 한다. 처음 파르메니데스를 접할 때는 뭔 말도 안 되는 소리인가 했는데, 그의 말을 들어볼수록 그럴듯하게 느껴졌다. 세상에 변화와 운동이 없다는 말이 그냥 듣기엔 헛소리 같지만, 파르메니데스를 접하면 그저 헛소리로 들리지 않을 것이다. 또한 반박하기도 쉽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파르메니데스를 개인적으로 좋아한다. 자극적인 주장이지만, 반박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개인적으로 고대 철학사에서 가장 난해하고 어려운 인물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파르메니데스는 기원전 5세기경에 활동한 엘레아 출신의 철학자이다. 그는 엘레아학파였으며, 그의 스승인 크세노파네스 보다 더 대단하였기 때문에, 파르메니데스는 엘레아학파의 대표적인 철학자로 알려져 있다. 러셀의 "서양철학사"에서는 소크라테스가 청년시절(B.C 450년경)에 파르메니데스에게서 많으 배웠다고 한다. 하지만 요하네스 힐쉬베르거가 쓴 "서양철학사"는 그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에 거짓이라고 주장한다. 대체 누가 맞을까? 소크라테스가 파르메니데스를 만났는지는 알 수 없지만, 소크라테스의 제자인 플라톤의 '이데아(Idea) 사상'이 파르메니데스의 일자론의 영향을 받은 것은 확실한 것 같다. 


  파르메니데스는 플라톤이 현실 세계를 동굴 안의 세상이라 비유하고, 허상이라고 주장한 것과 같이 감각은 기만적이며, 감각적인 것들은 단지 환각에 불과하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현실의 모든 것은 거짓이며, 유일한 참된 실재는 일자(一者, the one) 뿐이라고 주장한다. 이 일자는 무한하고, 분할 불가능하다. 따라서 모든 것은 하나이며, 둘은 없다. 분할 불가능하다는 주장을 헤라클레이토스의 대립물의 투쟁과 비교해보자. 헤라클레이토스는 온도를 차갑다와 뜨겁다로 구분할 것이다. 하지만 파르메니데스는 차가운 것은 없으며, 뜨겁지 않은 것과 뜨거운 것이 있다고 말할 것이다. "차갑다"는 말을 "뜨겁지 않다"라고 대치한 것은 동의한다. 하지만 아래부터는 뭔 소리인지 모를 수도 있다.


"Only being is, not being is not and can not be thought."

  존재하지 않는 것에 대해서는 알 수 없고 또 말할 수도 있다. 사유될 수 있는 것과 존재할 수 있는 것은 동일한 것이다. 대체 무슨 소리일까. 흔히들 이 문장을 있는 것은 있고 없는 것은 없다고 이해하는 것 같다. 세상에 당연히 없는 것은 없고, 있는 것은 있다. 지금 나에게 아내가 없으니 아내는 없고, 나는 노트북이 있으니 노트북이 있다. 하지만 언제가 내가 결혼을 할 수도 있고, 노트북이 없을 수도 있다. 하지만 파르메니데스는 이런 식으로 말한 것이 아니다. 그는 생성(becoming)과 사라짐(passing away)는 없다고 주장한다. 즉, 있는 것은 계속 있으며, 없는 것은 새로 생겨나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리고 실재하는 사물의 명칭에 부합되는 사유만이 있을 수 있다고 러셀의 책에 쓰여있는데, 이는 사유와 언어의 일체를 주장하는 것일까?


변화란 없다.

  변화란 사물이 어떤 때는 존재하고, 어떤 때는 존재하지 않는데서 이루어지기 때문에, 파르메니데스는 변화란 불가능하다고 말한다. 그는 존재란 완전히 동그란 구슬 모양과도 같이, 그 테두리에 쭉 고르게 둘러싸인 채로 영원히 정지되고 고정되어 있다고 한다. 그의 말을 들어보면 세상에 '존재하는 것들'만이 정지한 채로 일자로써 존재한다는 것이다. 정지해 있는 존재들은 인간과 자연, 동물 등을 다 포함한 것이다. 그렇다면 누군가는 이렇게 반박을 할 수 있다. "내가 파르메니데스 당신에게 싸대기를 때린다면 나는 내 손을 움직이는 것(물리적 운동)이며, 당신의 얼굴 근육 또한 움직일 것이오. 또한 당신도 통증을 느낄 텐데 정말 우리가 정지해 있단 말이오?" 파르메니데스가 일반적인 사람이라면 얼굴을 맞고 아픔을 느낄 것이며, 때린 사람의 손에 의해 얼굴 근육이 흔들릴 것이다. 따라서 위의 반박은 그럴듯하다. 


  하지만 파르메니데스는 이런 식으로 방어할 것이다. "당신의 감각은 기만이며, 감각적인 것들은 단지 환각에 불과합니다. 당신이 타격감을 느낀 것과 내가 고통을 느낀 것 그리고 그때가 일치하는 까닭은 세상은 하나의 일자이기 때문이오." 그렇다면 누군가가 또 반박을 할 것이다. "감각이 기만인 것을 어떻게 아느냐?" 이 질문에 과연 파르메니데스는 대답을 할 수 있을까? 하지만 이 질문의 질문자 역시 감각이 기만이 아님을 증명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파르메니데스의 주장을 무너뜨릴 수 없다. 

 

  파르메니데스의 철학은 정말 어렵고 난해하다. 책들을 보니 일각수(unicon)와 미국의 초대 대통령 조지 워싱턴 등을 사례로 러셀은 파르메니데스의 철학을 설명하는데, 나는 도저히 완전히 이해해서 글로 풀어서 설명할 수가 없었다. 분명히 없는 것은 없고, 있는 것은 있다. 근데 우리는 어떻게 없어는 것(소멸)과 생기는 것(탄생)까지도 파르메니데스에게 설득할 수 있을까? 


  파르메니데스가 감각을 기만적이라 하고, 감각적인 것들이 단지 환각에 불과하다고 말한 것은 데카르트의 코기토(cogito) 명제를 생각나게 하기도 한다. 아무튼 파르메니데스를 한번 대강 요약하고 싶었는데, 드디어 그 숙제를 해냈다. 몇 번을 봐도 나는 파르메니데스를 이해하지 못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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