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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경수 Sep 24. 2022

두 가지 자유

존 스튜어트 밀 『자유론』을 읽고.

존 스튜어트 밀(John Stuart Mill, 1806~1873)

  존 스튜어트 밀은 나름 유명한 철학자이다. 『자유론』,『공리주의』등 유명한 저서들과 전 영국 하원의원이라는 경력 그리고 무엇보다 그의 영재성으로 유명하다. 하지만 내가 이 사람을 유명하다고 한 이유는 이 중에 없다. 내가 이 사람을 유명한 철학자로 보는 이유는 철학을 공부하기 전부터 이 사람의 사상을 알았기 때문이다. 교양 강의에서 칸트의 윤리적 형식주의와 반대의견으로 공리주의를 배웠는데, 벤담은 돼지의 철학이라고도 불리는 양적 공리주의를 주장했고, 밀은 질적 공리주의를 통해 쾌락에도 질적 차이가 있음을 주장했다. 그때 배운 공리주의와 형식주의는 지금까지도 다루는 내용인데, 그때는 내가 철학을 공부하게 될 줄 몰랐다. 아무튼 내가 철학을 집중적으로 공부하기 전에도 이름을 들었기 때문에 나는 밀이 유명하고 대중적인 철학자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요즘에 밀에 대한 책을 주로 읽었다. 먼저 그의 자서전을 읽었는데, 축제라서 그런지 눈에 너무 들어오지 않아서 읽다가 반납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나에게 너무 재미가 없어서 굳이 꾸역꾸역 읽을 필요를 느끼지 못해서 그냥 읽다 말았다. 하지만 『자유론』은 오늘 세 시간 만에 다 읽었다. 138페이지 분량의 짧은 책이라서 금방 끝내기도 했지만, 내용이 푸코의 '지식의 고고학'과 비슷한 의견을 가지는 것 같아서 더욱 몰입되었다. 처음엔 그저 도덕적인 자유인 줄 알았는데, 이 책은 사유하는 인간으로서, 사유를 발화하는 개인으로써의 자유에 대해 말하는 책이었다. 제1부 '서론'과 제2부 '사상과 토론의 자유'로 이루어진 짧은 책이다. 


  1부에서 밀은 정치적인 의미에서의 자유에 대해 말한다. 그는 자유가 지배자의 폭정에 대한 보호를 의미했었다고 한다. 정치적 지배자들 즉, 한 사람의 통치자 혹은 어떤 종족이나 신분이라는 지배 집단으로 구성된 그들은 자신의 권위를 세습이나 정복으로 획득했지, 피지배자의 뜻에 따라 유지했던 것은 아니다. 따라서 지배자와 피지배자의 관계는 협의나 조약에 의한 평등한 관계가 아니라 힘의 차이에서 비롯된 권력에 의한 강제적인 지배관계이다. 지배자와 피지배자의 관계는 주종관계와 같이 지배자가 갑이고, 피지배자는 을의 자리이다. 


  "애국자들의 목표는 지배자가 공동체에 행사하는 권력에 제한을 가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제한이 그들이 의미했던 자유였다.(J.S. 밀,『자유론』, 이종훈 옮김 , 24p)" 우리가 흔히 가지는 애국에 대한 이미지 혹은 프레임은 오직 나라만을 위하는 열사 혹은 투쟁가일 것이다. 일제 강점기에 항일 운동을 하는 사람들이나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때 나라를 지키는 사람들과 같이 외세의 공격에서 나를 지키는 것을 애국이라 생각할 것이다. 근데 밀은 반대로 내부에서 투쟁을 하는 자가 애국자라고 말하는 것 같다. 그는 애국자들이 외세로부터 조국을 지키는 것만을 애국으로 한정 짓지 않고, 지배자가 폭정을 하는 것을 대비하여 권력자의 권력에 제한을 가하는 것도 애국이라고 주장하는 것 같다. 


  그렇다면 왜 지배자가 공동체에 행사는 권력에 제한을 가하는 것일까? "사회의 주류(主流)와 다른 의견을 가진 사람들에게 사회의 사상(ideas)과 관행(practices)을 행위의 규범으로 강요하는 경향에 대해 유력한 여론과 감정의 폭압으로부터의 보호가 필요하다.(같은 책 30p)"의 구절과 같이 소수라고 혹은 다른 의견을 가졌다고 강제로 동일자화시키는 것을 막기 위함이다. 왜 밀이 소수의 의견에 귀를 기울이고, 존중했는지는 제2부에서 자세히 알 수 있다.


  밀은 인류가 개인적으로나 집단적으로 그 구성원들 가운데 어떤 사람의 행동의 자유를 침해하는 것이 정당화되는 유일한 목적은 자기 방어(self-protection)뿐이라 말했다. 예를 들어 강도가 식칼을 가지고 나를 죽이려 한다면 나는 강도가 식칼을 나에게 휘두를 자유를 침해할 수 있다. 또한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을 죽이려는 강도를 내가 대신 무장해제시키는 것 또한 정당한 행위일 것이다. 하지만 반대로 열심히 요리를 하는 사람의 칼을 뺏고 그의 일을 방해한다면 그것은 정당한 행위가 아닐 것이다. 만약 그 요리사가 회를 뜨고 있었다면, 회를 뜨는 행위가 나에게 피해를 줄까? 다시 말해서 나는 자기 방어를 위해서 회 뜨는 것을 막을 수 있을까?


  전자는 정당한 이유로 타인의 자유를 침해하는 것이고, 후자는 그저 타인의 자유를 침해하는 것이다. 이러한 부분에서 나는 밀이 자유지상주의자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밀은 자기에게 피해를 주지 않다는 경우라면 상대가 무얼 하든 신경 쓰지 말고 존중해주라고 말한다. 하지만 나에게 피해를 준다면 자기 방어의 이유로 타인의 자유를 침해하는 것은 허락했다. 


  하지만 밀은 야만인을 다스릴 경우 독재는, 그 목적을 효과적으로 실현함으로써 정당화되는 수단이라고 한다. 야만인들이 피해를 줄 수 없는 거리에 있는 강대국이 그들을 침략할 경우 밀은 그것이 정당하다고 말하는 것일까? 분명 윗 단락에서는 자기 방어로써만 타자의 자유를 침해하는 것을 허락한다고 했는데? "개인은 자신이 행동하거나 행동하지 않음으로써 다른 사람들에게 해를 끼칠 수 있는데, 어떤 경우든 그는 그 해악에 대해 당연히 다른 사람들에게 책임을 져야 한다.(43p)" 이 문장이 과연 답이 될까? 나는 어느 정도 된다고 생각한다. 야만인들의 무지와 천박함이 인류의 발전과 진보에 해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 관점 한에서는 그 침략이 허용된다고 할 수 있다.(밀의 입장에서) 하지만 그러한 사고는 오지랖 같다. 그들이 필요하다고 호소하거나 요구하지 않은 개발과 문명화를 준다고 무조건 그들이 행복할까? 과연 우리 문명이 그들의 문명보다 더 우월하다는 것을 누구의 기준에서 판단할 것이며 어떻게 보장할 것인가? 그래서 나는 이러한 관점의 사고와 독재의 정당화는 오지랖이며 이기주의적이라 생각한다. 다수의 쾌락도 중요하지만 소수의 권리도 존중하는 밀로 나는 알고 있는데, 내가 잘못 이해한 것일까? 쓰다 보니 좀 의아스럽다. 쾌락을 질에 따라서 고급 쾌락과 저급 쾌락으로 나눈 철학자 다운 발상이라고 해야 할까? 이 부분은 공리주의 편에서 다시 다루는 걸로.


  제2장 사상과 토론의 자유에서 밀이 말하는 주장은 미셸 푸코의 팬으로서 와닿는 장이었다. 밀은 권력층이 억압하는 주장도 진리일 수 있기 때문에, 소수의 의견도 존중해야 한다고 한다. 만약 소수의 의견이 오류이고, 다수의 의견이 진리일 경우, 진리는 오류와의 충동을 통해서 보다 명백한 인식과 생생한 인상을 얻을 수 있다. 반대로 소수의 의견이 진리에 더 합당한 경우, 새로운 진리로 대체할 기회를 얻게 되며 그 전의 진리는 오류로써 폐기될 것이다. 그래서 밀은 자유로운 사상과 토론을 장려한다. 그러한 자유로운 사유와 토론이 우리를 진리에 더 가깝게 갈 수 있게 해 주거나, 기존의 진리를 더욱 명백하게 옳음을 증명할 수 있기 때문이다. 


  1장에서 행위로써의 자유를 말했다면, 2장에서는 사유와 토론을 통해 자신의 사상을 검열 없이 말할 자유를 말했다. 이는 마치 파레시아(parrhesia)를 생각나게 한다. (파레시아란 간단하게 말해서 기울어진 권력관계에서 자신의 소신을 밝히는 말하기를 말한다.) 소수의 의견이 진리일지는 토론을 하기 전에는 모른다. 과거에 갈릴레이, 코페르니쿠스와 같은 학자들이 지동설을 주장했을 때, 사람들은 헛소리라 생각했지만, 지금은 그의 반대의견인 천동설이 헛소리라 여겨진다. 이처럼 오류가 진리가 동등한 위치에서 충돌하기 전에는 무엇이 진정한 진리이고 오류인지 우리는 알지 못한다. 어쩌면 지금 우리가 당연하다고 믿고 있는 어떤 것들 또한 새로운 진리로 대체되고, 오류로 전락할 수도 있다. 그래서 밀은 자유롭게 사유하고, 토론하라고 우리에게 말하는 것이 아닐까? 1부에서 행위로써의 자유를 말한 것도 2부에서 자유로운 사유를 장려하기 위한 빌드업이었나?


요약

제1장 서론 : 타인이 나에게 피해를 주는 경우, 자기 방어로써 타인의 자유를 침해하는 것이 가능하다.

제2장 사유와 토론의 자유 : 사유를 자유롭게 하라. 그리고 소수 혹은 약자의 사상이 진리일 수 있으니 공정한 토론을 통해서 서로 충돌하여 진리와 오류를 가려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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