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교 때 MBC <PD수첩>, KBS <시사투나잇>에서 스크립터 아르바이트를 했습니다.
몇 번 테이프 몇 분 몇 초에 어떤 장면이 찍혀있는지 기록하는 막내 작가 보조였어요. 인터뷰 화면 하단에 자막으로 들어갈 내용을 타이핑하기도 하고요.
<시사투나잇>은 생방송이라 시간에 쫓겼고, <PD수첩>은 실제 방송 분량의 60~100배나 되는 촬영본을 일일이 보며 편집할 수 없으니 밑작업을 하는 거죠.
부끄럽지만 그때까지 세상이 알아서 돌아가는 줄 알았고, 아주 열심히 한 것도 아니면서 시키는 공부만 했어요.
스크립터 일을 하면서 '난 시사에 관심을 갖는 어른이 되겠다, 그리고 그런 사람과 결혼해야지.' 마음먹었습니다.
대학교 졸업 후 방송국 취준생으로 고향에 내려왔을 땐 정당 계열 사단법인에서 4개월가량 일했습니다.
지역균형발전 사업의 일환으로 여성 교육 프로그램을 기획하고 운영하는 업무를 도맡아 했어요. 예산에 맞춰 장소나 강사를 섭외하고 수강생을 관리하는 일 자체는 재밌었지만 당시에 정치인, 정확하게는 정치인 주변을 어슬렁거리는 사람들에게 많이 실망했습니다.
머리와 입으로 희망회로만 열심히 돌리고, 술버릇은 위태롭고, 각자 호시탐탐 자기 잇속만 챙기려 드는 게 제 눈에도 다 보였으니까요. 급여까지 밀려 속앓이 하던 중에 방송국 입사 시험에 합격해 뒤도 안 돌아보고 떠났습니다.
자기도 힘들다, 앓는 소리 하며 급여 문제를 빨리 해결해주지 못해 미안하다던 사무처장은 알고 보니 400만 원씩이나 꼬박꼬박 챙겨갔다더라고요.
저런 사람들이 정치를 하려는 이유가 뭘까, 의문을 품었습니다.
JTBC 드라마 <보좌관>을 재밌게 봤습니다.
아무래도 신민아, 이정재가 맡은 역할에 감정 이입을 하지 않았겠어요? 국회의원 배지 달아보겠다고 더러운 꼴 참고, 능력이 있어도 초선 의원이라 힘을 못쓰고 아주 속 터지더군요.
학생회장 출신에 정치 꿈나무이기도 했던 남편에게 저것 좀 보라며 겁을 단단히 주었습니다.
진심인지, 아직은 아니라는 건지, 단지 제 입막음을 위해서인지 일단 남편은 정치를 하지 않으마 저와 약속했습니다.
물론 그 드라마 때문만은 아니죠. 관심이 있었던 사람도 등 돌리게 하는 게 지금의 정치라면 과연 잘 가고 있는 걸까요?
점점 뉴스를 보기 싫어집니다. 이런 어른이 되지 않으리라 다짐했는데 아주 많이 흔들리고 있어요.
그래도 투표권은 꼬박꼬박 행사하고 있습니다.
결혼한 지 10년이 채 되지 않았는데 예정에 없던 선거를 치르는 게 벌써 두 번째입니다.
학생들은 꽁으로 얻은 빨간 날을 반기지만 휴강 안내하면서 저는 어른으로서 부끄러워요.
선거철마다 전국이 세로로 반토막 나서 왼쪽은 파란색, 오른쪽은 빨간색.
그러고 보니 '빨갱이'라 불리는 당은 파랗고, '빨갱이'를 욕하는 당이 빨갛네요?
이왕 이렇게 된 거 태극무늬처럼 어우러지면 얼마나 좋아요.
선 딱 그어 상대 후보 깎아내리고 손가락질하는 정치는 이제 좀 그만하면 안 될까요?
사랑하면 상대방이 좋아하는 걸 해주는 것보다 싫어하는 걸 안 하는 게 우선이니까요.
국민들은 정치인들이 편갈라 헐뜯고 싸우는 거, 그거 질색입니다.
엘프리드 화이트헤드의 명언 '보통 교사는 지껄인다. 좋은 교사는 잘 가르친다. 훌륭한 교사는 스스로 해 보인다. 위대한 교사는 가슴에 불을 지른다.'에서 교사 자리에 정치인을 넣어보면 어떨까요?
<<보통 정치인은 떠든다. 좋은 정치인은 잘 설득한다. 훌륭한 정치인은 직접 나선다. 위대한 정치인은 국민 가슴을 뜨겁게 한다.>>
위대한 정치인까진 바라지도 않습니다.
불 대신 염장이나 안 질렀으면 좋겠습니다.
어떤 정당, 특정 후보의 정책으로 인해 살림살이가 반짝 나아지리라 기대하는 게 아닙니다. 즉효를 보이는 마약성 진통제 말고 체질 개선하는 한약이면 오히려 좋아요.
최소한 내가 뽑은 사람이 퇴임 후에도 부끄럽지 않기를 희망할 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