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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주이 May 13. 2020

할머니

보호자가 된 의료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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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는 아빠를 정말 많이 사랑하셨다.
열 손가락 깨물어 안 아픈 손가락이 어디 있겠냐만은 할머니는 유독 아빠를 많이 아끼셨다.

매년 명절마다 할머니께 용돈을 드리면
할머니는 자식, 손주들이 준 용돈을 고이 모아 우리가 큰집을 나설 때 아빠의 손에 꼭 쥐어 주시곤 했다.

60세가 넘은 아빠가 90세 노모에게 용돈을 받는 순간이었다.

우리는 모두 그 사실을 알았지만 모르는 척 다시 또 명절이 되면 할머니께 용돈을 드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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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 저 대학생 됐어요."

대학생이 된 설렘 가득했던 20살
대학에 합격했던 기쁨과 뿌듯함을 가득 담아 할머니에게 나의 소식을 전했을 때,
할머니에게서 돌아온 답변은 나의 기대와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기술 배워라. 아빠 고생시키지 말고."

지금은 웃으면서 말하는 에피소드가 되었지만
그때는 어린 마음에 할머니의 반응이 못내 섭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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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3년생 김주이가 태어나던 시절
나의 성별이 여자임에 할머니도 아빠도 그리고 엄마도 서운한 마음을 숨길 길이 없었을 것이다.
태중에서 유별나게 고급지고 많은 음식을 당기게 했던 나는 필시 아들 이리라는 기대감을 주었단다.


그래도 할머니는 우리에게 단 한 번도 서운한 내색을 비추지 않은 채 우리를 돌봐주셨다.

시랑 하는 아들의 두 딸
예쁘고 소중하면서도 알 수 없는 아쉬운 감정도 드셨겠지...

하지만 큰 집에 가면 우리는 누구보다 할머니 곁에 딱 붙어 안방을 차지하고 있었으니 그 어떤 사촌 오빠나 남동생들이 와도 그들이 그 시절 더 귀한 대접을 받은 존재라는 걸 느끼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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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삼 너희 할머니께 감사한 마음이 든다.
할머니가 정말 대단한 분이셨어."

시완이와 유하를 돌봐주시는 엄마는 요즈음 이런 말씀을 자주 하신다.

어린 시절 할머니가 나와 언니를 돌봐주셨을 때 할머니의 연세가 지금 엄마의 연세보다 많았다.

할머니는 나의 숙제도 봐주시고 옛날이야기도 많이 들려주셨는데, 엄마는 요즈음 옛날이야기를 해달라는 시완이를 보며 그 시절 그렇게 많은 새로운 이야기를 들려주셨던 할머니의 능력이 새삼 대단하게 느껴진다고 하셨다.

철없던 시절 나에게 늘 작게만 보였던 할머니가 점점 큰 존재로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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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 저랑 사진 한 장 찍어요."

추석에 큰 집에서 돌아오는 길,
변함없이 우리를 배웅해주시는 할머니와 사진을 찍었다.

생각해보니 크고 나서 할머니와 함께 찍은 사진이 없었다.

늘 할머니 곁에는 어린 나만 있었는데,
이제는 성인이 된 나와 조금 더 나이 드신 할머니기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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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는 100세 장수 할머니셨다.
100세의 나이에도 9층 아파트를 걸어오를 정도로 정정하셨다.
지병 하나 없이 건강하셨다.
그 누구도 고생시키지 않으셨다.


그런 할머니가 아빠가 돌아가시기 1년전 세상을 떠나셨다.

아빠가 외로울까봐 먼저 저 세상을 둘러보러 가셨나보다.

마지막까지 할머니는 아빠를 생각하신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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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가 가시던 날,
할머니가 아빠를 마중나왔을 것 같았다.
할머니가 계셔서 아빠가 외롭지 않을 것 같다.

두 분은 지금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계시겠지.

할머니 보고싶어요.

그리고 늘 감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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