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8. 인간관계-실패 이야기
하노이에서 만나는 사람들은 하나 같이 친절한 얼굴이다. 직장에서 만난 모든 사람들의 얼굴에서 백화점이나 호텔 직원들의 훈련된 미소 비슷한 것을 본다. 배운 사람들의 교양, 매너일 수도 있겠다. 그러나 나는 그 뒤에 감춰둔 그들의 과잉된 자의식과 타인에 대한 경계심에 데이곤 한다.
anyway~
나보다 네 살이 많은, 베트남에서 15년 차 근무 중인 선배가 있다. 그녀는 내가 이곳에서 사적으로 가끔 연락해 술 한잔 하는 몇 안 되는 사람 중 한 명이다. 그녀와 가까워진 것은 2년 간 같은 사무실을 썼던(지금은 다른 사무실이다) 인연도 있지만 무엇보다 올해 귀임한 내 절친을 통해 만난 술자리가 계기였다. 나이에 비해 세련되고 운동도 잘하고 아들 둘을 멋지게 잘 키워낸 그녀인 데다 베트남에서 장기 근무를 한 탓에 이것저것 정보도 많은 선배였다. 사실 술을 좋아한다는 공통점이 젤 좋았다. 우리는 여럿이 또는 둘이 가끔 만나 술을 마셨고 이것저것 직장 문제나 사람들 얘기를 했다.
하지만 그녀는 내가 이곳에 오기 전에 근무했던 사람들이나 현재 같이 근무하는 사람들에 대해 부정적으로 평가하고 뒷 말을 하는 일이 잦았는데 뭐 술자리에서 흔히 있는 일이니 그러려니 했었다. 물론 나도 짜증 나는 일이 있거나 일적으로 껄끄러운 관계가 된 사람들 이야기를 하기도 했고 대체로 분위기를 맞추며 맞장구를 쳤다. 뭐… 술자리니까….
작년에 나와 친한 친구(그녀와 같은 부서)와 일적으로 불편한 일이 있었던 그녀가 술자리에서 내 친구에 대해 안 좋은 얘기를 했을 때 나는 친구 입장을 두둔하며 마음속으로는 그녀의 ’모두 까기‘ 능력에 언젠가 나도 까이겠구나 싶었다. 나와 가까운 후배 한 명은 첨에 그녀의 총애를 받다가 역시 술자리에서 MZ 답게 소신 발언을 한 후 손절을 당했고 이후 그녀는 역시나 그 후배 얘기를 나에게 안 좋게 했었다. 나는 적절하게 내 가까운 사람들을 지키며 그녀에게도 좋은 후배 노릇을 잘하고 싶었다. 뭐 어찌 됐건 함께 보낸 시간과 함께 나눈 이야기들에 대한 책임 같은 것이랄까?…
문제는 한 달여 전에 둘이 술 한잔을 하던 자리에서 일어났다. 업무적인 얘기를 하다 동료들의 처신에 대해 비판적인 얘기가 나왔는데 하필 화제가 그녀도 피해 갈 수 없는 영역이었고 그럼에도 가열찬 비판을 날리는 그녀에게 내가 참다못해 ”부장님도 그 비판에서 자유로울 수 없죠. “ 이런 말을 해버렸다. 그러다 그간의 그녀의 문제 행동에 대해 이야기를 하게 되었는데…. 자신은 무결점의 인간이라 믿는 것인지 그녀는 나의 말을 공격이나 비난으로 받아들인 것 같다. 그 자리는 아름답게 잘 마무리되었고 다음날 카톡 메시지도 멀쩡하게 주고받았는데….
이상하게 그 이후로 복도에서 마주쳐도 인사를 쎄~하게 받는 느낌이었다. 촉이 오는 게 심상치 않더니 인사를 대충 받아넘기고 피하는 것 같기도 하고 불편한 기색을 비쳤다.
지난 금요일에는 그 정도가 확연히 느껴져서 일하는 중에 시간을 내어 얘기 좀 하자고 할 참이었다. 근데 너무 일이 바빠 잠깐의 짬을 내지 못했다. 그러고 다음날 후배와의 저녁 식사 자리에서 충격적인 얘기를 들었다. 그녀가 다른 사람들에게 나에 대한 안 좋은 얘기를 하고 다닌다는…… 뭐 그럴 수도 있지만~
그래도 지금까지 술 한잔씩 하며 내가 어떤 사람인지 알았을 텐데…. 나는 그저 오해가 있음 풀고 뭐 서로 가까이 지내지는 않더라도 원수는 되지 말자 정도의 선에서 페어 하게 마무리하고 싶었는데 내가 타이밍을 놓친 건지…
뭔가 억울하다. 나는 그녀가 나에게 했던 수많은 얘기들을 퍼 나른 적이 없다. 실제로 나와 가까운 사람들을 험담할 때 내가 그들을 두둔한다고 언짢아했던 그녀에게 나는 “누군가 부장님에 대해 이렇게 얘기해도 저는 지금처럼 두둔할 거고 그게 제 의리예요.”라고 했었는데…. 사람이 고급지진 않아도 이렇게 후지게 행동할 줄이야.
주말 내내 신경이 쓰였다. 찾아가서 얘기 좀 하자고 해서 솔직하게 말하고 깔끔하게 정산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다. 그녀가 아쉽지는 않다. 그저 내 시간과 애정을 낭비한 게 억울하다. 이 후진적인 문화에 발을 담그고 사는 게 괴롭다. 성인이 되어 이렇게 남의 얘기를 함부로 많이 하는 사람들을 첨 본다. 해외 생활이 참 웃기다. 여기는 한인 사회에서 별별 일들이 다 소문이 되더라. 직장이 사생활과 공간이나 멤버 분리가 되지 않는 좁디좁은 이 생태계에서 말한마디가 눈덩이처럼 불어나고 각색되고 창조되어 날아다닌다.
그 꼴 안 보려고 모든 회식과 사모임을 거부하고 그나마 가끔 만나는 사람들만 보고 살았던 건데.. 이건 뭐… 그녀에 대한 원망은 없다. 철학도 없고 인간에 대한 예의도 없는 그런 류의 사람을 한국이었으면 절대 사적으로 만나지 않았을 것이다. 정을 주지도 않았을 것이다. 늘 생각했다. 내 생각 내 감정 내 발언 내 행동에 대한 책임… 그래서 책임을 지려고 한다.
아무나에게 정을 준 것에 대한 책임, 아무나 나를 입에 올리게 행동한 책임, 아무나 나를 함부로 씹어대게 산 책임…
그래도 몹시 후지다. 이 상황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