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장지배적 사업자의 '숙명적 책임'과 남용의 객관화

CJEU 호프만 라 로슈(Hoffmann-La Roche) 판결 평석

by 날개

유럽 연합(EU)의 경쟁법 체계는 미국의 셔먼법과는 다른 역사적 배경과 철학적 토대 위에서 발전해 왔다. 미국이 20세기 후반 렌퀴스트 법원을 거치며 효율성과 소비자 후생을 명분으로 규제 완화의 길을 걸었다면, 유럽 사법재판소(CJEU)는 시장 통합과 공정한 경쟁 구조의 유지를 위해 지배적 사업자에게 엄격한 잣대를 들이대 왔다. 이러한 유럽식 규제 철학의 정점이자 현대 플랫폼 규제의 모태가 된 사건이 바로 Hoffmann-La Roche & Co. AG v Commission, Case 85/76 (1979)이다. 이 판결은 지배적 지위에 있는 기업은 일반 기업과는 다른 '특별한 책임'을 진다는 법리를 확립함으로써, 유럽 경쟁법이 나아갈 독자적인 길을 개척했다.


사건의 발단은 세계적인 제약회사인 호프만 라 로슈(Hoffmann-La Roche & Co. AG)가 비타민 시장에서 행사한 지배적 영향력이었다. 당시 로슈는 비타민 A, B, C, E 등 주요 비타민 시장에서 압도적인 점유율을 차지하고 있었으며, 대규모 구매자들과 이른바 '충성도 리베이트'(fidelity rebates)가 포함된 독점 공급 계약을 체결했다. 구매자가 필요한 비타민 전량 또는 대부분을 로슈로부터만 구입할 경우 파격적인 할인을 제공하는 방식이었다. 유럽 집행위원회(EC)는 이것이 경쟁사의 진입을 차단하는 시장지배적 지위 남용이라고 보아 과징금을 부과했고, 로슈는 이에 불복하여 유럽 사법재판소에 제소했다.


CJEU는 판결을 통해 '시장지배적 지위'(dominant position)에 대한 기념비적인 정의를 내렸다. 법원에 따르면 지배적 지위란 "경쟁자, 고객, 그리고 최종 소비자의 반응에 상관없이 상당한 정도로 독립적으로 행동할 수 있는 경제적 힘의 상태"를 의미한다. 이는 단순한 시장 점유율 수치를 넘어, 기업이 시장의 경쟁 발전 조건에 실질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능력을 갖추었는지를 중시하는 관점이다. CJEU는 로슈가 보유한 막대한 시장 점유율과 고도의 기술력, 광범위한 유통망이 결합되어 이러한 독립적 행동 가능성을 부여했다고 판단했다.


이 판결의 가장 핵심적인 논리는 '남용'(abuse) 개념의 객관화에 있다. 로슈는 자신들의 리베이트 정책이 강제가 아닌 구매자와의 합의에 의한 것이며, 경제적 효율성을 증진시킨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법원은 남용을 "지배적 사업자의 행위가 시장 구조에 영향을 미쳐 경쟁의 수준을 약화시키는 객관적인 개념"이라고 규정했다. 즉, 지배적 사업자의 주관적인 의도나 구매자의 자발적 동의 여부와 상관없이, 그 행위가 결과적으로 경쟁자의 시장 진입을 방해하고 소비자의 선택권을 제한한다면 그것만으로도 남용에 해당한다는 것이다. 이는 남용의 증명 책임을 엄격히 요구하는 미국식 법리와 구별되는 유럽 특유의 엄격주의를 보여준다.


특히 법원은 로슈의 충성도 리베이트가 '가격 경쟁'이 아닌 '시장 봉쇄'를 목적으로 한다고 보았다. 구매자가 다른 저렴한 제품을 사고 싶어도 이미 받은 리베이트를 잃지 않기 위해 계속 로슈 제품만을 사야 하는 '고착 효과'(lock-in effect)를 발생시키기 때문이다. 법원은 "지배적 지위에 있는 사업자는 그 지위의 존재만으로도 시장의 경쟁 구조를 훼손하지 않아야 할 특별한 책임(special responsibility)을 진다"라는 불멸의 법리를 선언했다. 이 '특별한 책임' 원칙은 이후 40년 넘게 유럽 경쟁법의 근간이 되었으며, 오늘날 구글이나 애플 같은 빅테크 플랫폼이 왜 일반 기업보다 훨씬 강력한 규제를 받아야 하는지에 대한 논리적 근거가 되었다.


로슈 판결은 이후 Intel v Commission (2017) 판결을 통해 '효율적 경쟁자 테스트'(AEC Test)가 도입되기 전까지 유럽 리베이트 규제의 절대적인 표준으로 군림했다. 미국이 Verizon v. Trinko (2004) 판결을 통해 독점 기업의 거래 거부나 배타적 행위에 관대한 태도를 보인 것과 대조적으로, 유럽은 로슈 판결의 정신을 이어받아 거대 기업의 행위가 시장의 '다양성'과 '구조'를 해치는지를 끊임없이 감시해 왔다. 이러한 차이는 결국 미국은 거대 플랫폼의 성장을 방임하는 결과를, 유럽은 플랫폼에 대한 선제적이고 강력한 규제(DMA 등)를 도입하는 결과로 이어졌다.


우리나라의 공정거래법 체계 역시 로슈 판결에서 정립된 '시장지배적 지위'의 정의와 '남용의 객관적 성격'을 상당 부분 수용하고 있다. 한국 대법원은 시장지배적 사업자의 행위가 경쟁 제한적 효과를 가질 경우 이를 엄격히 규제해 왔으며, 특히 대기업 집단의 배타적 거래나 리베이트 행위를 판단할 때 로슈 판결의 '특별한 책임' 논리는 매우 유용한 참고 자료가 되어 왔다. 디지털 경제 시대에 접어들어 국내 플랫폼 기업들의 지배력 남용 문제가 불거질 때마다, 유럽 법원이 1979년에 세운 이 오래된 정의는 여전히 가장 현대적인 해결책을 제시하고 있다.


결론적으로 이 판결은 단순한 비타민 가격 분쟁을 넘어, 자본주의 시장에서 거대 기업이 가져야 할 '윤리적·법적 경계'를 확립한 사건이다. 사법재판소는 자유로운 경쟁이 보장되기 위해서는 강자에게 더 무거운 멍에를 지워야 한다는 공정의 원칙을 세웠다. 록펠러의 스탠더드 오일 해체 이후 미국이 잃어버렸던 '구조적 경쟁 수호'의 정신을 유럽은 이 판결을 통해 계승하고 발전시켰다. 오늘날 우리가 목도하는 빅테크에 대한 유럽의 강력한 공세는 바로 1979년 로슈의 리베이트를 단죄했던 그 사법적 엄정함에서 시작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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