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 증거관리 거버넌스의 필연적 전환
2026년 1월 29일 상생협력법 개정안의 국회 통과로 공식화된 한국형 증거개시제도(K-Discovery)는 대한민국 민사소송 체계의 근간인 ‘자유심증주의’와 ‘당사자주의’의 지형을 근본적으로 재편하고 있다. 그간 기술탈취나 영업비밀 침해 소송에서 피해 중소기업이 겪어온 정보의 비대칭성 및 입증의 곤란을 해소하기 위해 도입된 이 제도는, 역설적으로 위탁기업인 대기업과 중견기업에 전례 없는 법적 대응 부하를 부과하고 있다. 이제 소송의 승패는 법정에서의 변론 능력이 아닌, 소송 전 단계에서 구축된 증거 관리 체계의 치밀함과 내부 데이터의 투명성에 의해 결정되는 시대로 진입하였다.
K-Discovery의 핵심적 화력은 법원에 의해 지정된 전문가가 피고의 영업 현장에 직접 진입하는 ‘전문가 사실조사제도’에 있다. 이는 영업비밀이라는 방어막 뒤에 숨겨진 설비, 공정, 디지털 자료를 외부 전문가가 실사하고 계측할 수 있도록 허용함으로써 기업의 내부 보안 경계를 공적으로 무력화하는 조치다. 상대방 당사자가 조사의 필요성을 소명하고 법원이 이를 수용할 경우, 기업은 자신의 핵심 생산 시설과 데이터베이스를 조사관에게 개방해야 하며, 이 과정에서 도출된 조사 보고서는 법정에서 강력한 증거 능력을 확보하게 된다. 이는 소송이 제기되기도 전에 기업의 핵심 자산이 외부에 노출될 수 있는 실존적 리스크를 내포한다.
이와 더불어 법원의 ‘자료보전명령’은 기업의 IT 운영 방식에 즉각적인 변화를 요구한다. 소송이 제기될 가능성만으로도 법원은 1년 이상의 기간 동안 특정 자료의 훼손이나 멸실을 금지할 수 있으며, 이를 위반하여 자료를 삭제하거나 은닉할 경우 7년 이하의 징역이라는 형벌과 함께 상대방의 주장을 진실로 인정하는 불이익이 부과된다. 이는 기업이 통상적으로 시행해 온 데이터 삭제 주기나 저장 매체 교체 작업조차 법원의 명령 하에서는 형사 처벌의 대상이 될 수 있음을 의미한다. 따라서 기업은 이제 사내의 모든 디지털 자산에 대해 법적 보존(Legal Hold) 절차를 자동화할 수 있는 고도화된 기술적 인프라를 갖추어야만 한다.
또한 미국식 데포지션(Deposition)을 벤치마킹한 ‘법정 외 당사자 신문’은 실무진과 경영진에게 심리적·법적 압박을 가중시킨다. 변호사가 선임된 양 당사자의 신청에 의해 법정 밖에서 이루어지는 이 신문 절차는 영상 녹화되어 증거로 제출되며, 정당한 사유 없는 출석 거부나 진술 거부는 곧 소송에서의 패소로 직결된다. 이는 과거 서면 질의와 답변으로 이어지던 소송 절차가 인적 증거의 실시간 검증 단계로 전이되었음을 뜻하며, 임직원들의 일상적인 업무 기록과 메일, 메신저 대화 내용이 신문의 핵심 소재로 활용되는 만큼 내부 컴플라이언스 교육의 질적 변화가 불가피해졌다.
결론적으로 한국형 증거개시제도는 기업에 ‘비밀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전제하에 경영 전략을 수립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상생협력법을 필두로 하도급법과 특허법으로까지 확산되는 이 제도의 파고를 넘기 위해서는 기술자료의 수취, 보관, 활용 전 과정에 대한 로그 기록 관리와 접근 통제 시스템의 재정비가 필수적이다. 증거가 현출되는 것을 막는 방어적 소송 전략의 시대는 종언을 고하였으며, 이제는 증거가 현출되더라도 자사의 행위가 정당했음을 입증할 수 있는 ‘실증적 준법 거버넌스’를 구축하는 기업만이 2026년의 강화된 사법 환경에서 생존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