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함이라는 알리바이

피투(被投)된 인간의 기괴한 변명

by 날개

우리는 우리가 원해서 이 세상에 온 것이 아니다. 어느 날 갑자기, 아무런 맥락 없이 이 세계의 한복판에 내던져졌다. 실존주의 철학자 하이데거는 이를 ‘피투성(Geworfenheit)’이라 불렀다. 이유 없이 던져진 존재는 필연적으로 불안하다. 뿌리 없는 부유함을 견디지 못한 인간은 본능적으로 자신을 지탱할 닻을 찾기 시작한다. 그리고 현대 사회에서 그 닻은 대개 ‘명함’이라는 이름의 알리바이가 된다.


대한민국에서 소속이 없다는 것은 단순히 직장이 없다는 경제적 결핍을 넘어선다. 그것은 사회적 실종이자 언어의 상실이다. 누군가를 만났을 때 “어디 다니세요?” 혹은 “무슨 일을 하세요?”라는 질문에 명쾌하게 답하지 못하는 순간, 피투된 존재의 기괴한 운명은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우리는 나를 설명하기 위해 사는 것이 아니라, 나를 설명할 근거를 마련하기 위해 산다. 4대 보험과 매달 찍히는 월급은 그 설명을 유지하기 위한 최소한의 유지비다. 명함 속의 로고가 번듯할수록, 우리는 자신이 이 세계에 던져진 우연한 존재가 아니라 어딘가에 꼭 필요한 정교한 부품이라는 착각에 안주할 수 있다.


회사의 공기는 대개 기이하다. 대놓고 소리를 지르는 폭언은 사라졌을지 몰라도, 그 자리는 속내를 알 수 없는 기괴한 뒤틀림을 가진 이들로 채워졌다. 상식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들, 영혼 없는 보고서의 무한 반복,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설계된 기형적인 규제들. 우리는 그 안에서 매일 환멸을 느끼지만, 결코 울타리 밖으로 쉽게 발을 내딛지 못한다. 그것은 실업에 대한 공포보다 설명의 공백에 대한 공포가 더 크기 때문이다. 조직 안에서의 권태는 월급으로 보상받는 참을만한 형벌이지만, 조직 밖에서의 자유는 나를 증명해야 하는 가혹한 고문이 된다. 평일 대낮, 정해진 목적지 없이 카페에 앉아 노트북을 펴고 있는 나를 향한 타인의 시선, 혹은 그 시선을 의식하는 나 자신의 비루함을 견디기에 인간은 너무도 나약하다. 우리는 나로 살기 위해 회사를 나가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시선이라는 감옥에서 가석방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 기괴한 이들이 가득한 회사로 다시 기어 들어간다.


체면, 커리어, 일상적 접촉, 그리고 사람 노릇. 이 모든 단어는 사실 개인이 실존적 심연을 들여다보지 못하도록 국가와 자본이 설계한 정교한 안대다. 4대 보험이라는 생명줄을 잡고 있는 한, 우리는 우리가 기계의 부속품일지언정 정상적인 인간이라는 확신을 얻는다. 하지만 질문해 보아야 한다. 명함이 사라졌을 때, 당신을 설명할 단어는 단 하나라도 남아 있는가? 소속이라는 알리바이를 걷어냈을 때 드러나는 그 텅 빈 공간이야말로 진정한 당신의 모습은 아닌가? 우리는 명함을 잃는 것을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라, 나를 설명할 외부의 언어가 사라졌을 때 직면하게 될 아무것도 아닌 나를 마주하는 것이 두려운 것이다.


피투된 인간은 평생 자신의 쓸모를 변명하다 죽는다. 어쩌면 이 기괴한 운명에서 벗어날 길 같은 건 처음부터 없었는지도 모른다. 명함 뒤에 숨어 그럴듯한 불행을 연기할지언정, 당장의 생존을 보장하는 노동의 굴레가 주는 안락함을 우리는 끝내 거부하지 못한다. 결국 우리는 오늘도 그 비겁하고도 달콤한 자위 속에서 하루를 버텨낼 동력을 얻는다. 하지만 기억해야 한다. 정년이라는 이름의 거대한 절벽 끝에서 이 소속이라는 가면이 강제로 벗겨지는 순간은 반드시 온다. 그때 마주할 진짜 나의 민낯이 너무 허망하지 않으려면, 시스템의 부품으로 기능하는 와중에도 내가 진정으로 좋아하고 잘하는 것을 찾아내려는 처절한 몸부림은 계속되어야 한다. 그것은 조직을 위한 커리어가 아니라, 가면이 벗겨진 뒤에도 나를 지탱해 줄 유일한 실존의 뼈대를 세우는 일이다. 부조리한 울타리 안에서 '사람 노릇'을 연기하며 버티는 지금 이 시간조차, 훗날 아무것도 아닌 나로 돌아갔을 때 나를 설명해 줄 단 하나의 진짜 언어를 찾아가는 과정이어야만 한다. 그것이 시스템에 순응하면서도 인간으로서의 마지막 자존심을 지켜낼 수 있는, 우리에게 허락된 유일한 저항이자 위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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