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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상규 Feb 27. 2023

고려 불화가 대부분 일본에 남아있는 까닭


고려 불화는 고려 시대의 일반 회화 작품이 거의 남아있지 않은 현재, 당시의 예술적 성취와 경향성을 엿볼 수 있는 소중한 문화유산입니다. 고려 불화의 예술성은 두 말할 필요가 없겠지만, 몇 가지 설명을 인용해보겠습니다.


특히, 탕후의 글을 보면 고려의 관세음보살 그림(아마 '수월관음도'였겠죠)은 당시에도 유명했다는 점을 알 수 있습니다.


“고려의 관세음보살 그림이 매우 솜씨가 뛰어난데, 이는 원래 당(唐)의 화가 위지을승(慰遲乙僧)의 붓놀림에서 나와 전해져 섬세함과 아름다움에 이른 것이다.”
“高麗畵觀音像甚工其源出唐尉遲乙僧筆意流而至于纖麗”
탕후(湯垕, 중국 원), 古今畵鑒


“(고려 불화는) 호화롭고 정교하여 귀족적인 아취(雅趣)가 넘쳐 청자(靑磁)와 더불어 이 시대 미술의 경향을 가장 잘 보여 준다고 하겠다.”
안휘준, 韓國 繪畵史, 일지사, 2004, 75면


“거대한 규모(높이 4.2m), 색채의 우아함, 복잡한 직물 패턴, 비단 같이 투명한 베일, 환상을 일으키는 듯한 투명함에서 (가가미진자 소장) 〈수월관음도〉는 고려 궁중과 관련된 회화 기관의 기술적 기교를 보여준다.”
“In its massive scale (4.2 meters in height), chromatic elegance, intricate textile patterns, and silky, gauze-like veil, almost hallucinatory in its diaphaneity, Water-Moon Avalokitesvara showcases the technical virtuosity of the painting workshops associated with the Goryeo court.”
Yukio Lippit, "Goryeo Buddhist Painting in an Interregional Context", Ars Orientalis 35, 2008, pp.193-232.


또한, 중국 북송대 화가이자 회화이론가인 곽약허(郭若虛, 11세기)는 <도화견문지(圖畵見聞誌)>에서 고려 회화에 대하여, "기교의 정교함이 다른 나라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이며, 고유한 단청(丹靑: 붉고 푸른 색채)의 오묘함이 있다"(홍선표, 2019, 재인용)고 한 바 있습니다. 해당 글은 11세기에 고려 회화에 대해 쓴 글이므로, 현재 주로 남아있는 13-14세기 고려 불화와 연대와 주제를 조금 달리하고 있으나 고려시대 미술의 전반적인 경향이 일관되게 이어져 왔음을 짐작하게 해주며, 고려 회화의 국제 교류에 대해 알 수 있게 해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고려 불화는 현재 일본에 남아있습니다.


게다가 1967년 미술사학자 구마가이 노부오(熊谷宣夫)가 연구 논문 「조선불화징(朝鮮佛畵徵)」에서 중국 불화로 인식되어 온 작품들 중 상당수가 고려 불화일 가능성을 제기하여 그 존재가 알려지기 시작하기 이전에는, 연구자들조차 그 존재를 몰랐습니다.


현재 남아있는 고려 불화는 160여 점으로 파악되고 있는데(여기서 '고려 불화'는 사찰 벽에 그려진 '벽화'나 경전의 일부로 그려진 '경전 변상도'를 제외하고, 종이나 천에 그려진 '탱화'만을 지칭하는 용어로 사용하겠습니다.), 이 중 130여 점은 일본에 보존되어 있고, 20여 점은 미국과 유럽에 있으며, 한국에는 10여 점만이 소장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일본 외의 지역 - 미국, 유럽, 한국 - 의 소장 작품은 모두 19-20세기 이후에 일본으로부터 구매하여 소장하게 된 것들입니다.




Charles Lang Freer (1854–1919), 미국의 미술품 수집가. 고려 불화 <수월관음도>, <아미타팔대보살도> 등을 소장하였다. <아미타팔대보살도>는 일본의 야마나카 상회(山中商會)로부터 1906년에 구입한 것.



그러니까 19세기까지는 아마 고려 불화가 전부 일본 열도에 있었을 것이라는 뜻입니다. 고려 불화 작품들은 중국의 불화로 오인된 채 일본 각지의 사찰에서 보물처럼 고이 모셔져 왔습니다. (일본 사찰에서는 그러한 중국과 한국의 오래된 불화들을 창고 같은 곳에 비밀스럽게 보관하고, 1년에 한 번 정도만 관리를 위해 꺼낸다는 글을 읽은 기억이 있습니다.)


한국 미술사의 명작들이 어쩌다 모두 타지 생활을 하게 된 것일까요? 이 부분에서 흔히 생각하게 되는 것은 왜구 또는 전란 중의 약탈이죠. 물론 그것이 근거가 없는 말은 아닙니다. 이와 관련된 기록이 남아있기도 하거든요.


고려 불화(혹은 어쩌면 조선 불화) 〈불열반도(佛涅槃圖)〉를 보관한 상자 뚜껑과 두루마리의 심목에 쓰여진 글에는, 그 그림이 임진왜란 시기 일본의 지방 번주(藩主)인 마쓰라 시게노부(松浦鎮信)가 조선에서 가져와서 최교사에 기증한 것이라고 쓰여 있습니다.




〈불열반도(佛涅槃圖)〉, 고려 말 추정, 일본 사이쿄지(最教寺). 기쿠다케 준이치(菊竹淳一)는 석가모니의 머리 표현, 등장 인물의 복식 표현, 구름 표현 등으로 그림의 연대를 고려시대 말기인 14세기 후반경으로 추정하였다(高麗時代의佛畵: 해설편, 한국미술연구소, 1997).




하지만 다른 경우도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돈을 주고 구입했거나, 조선 조정으로부터 선물을 받은 것일 수도 있습니다.


13-14세기 일본의 지방 귀족들은 한국의 불경과 범종 등 수준 높은 불교 문화재에 관심이 많았습니다(Lippit, 2008).


한국 범종(통일신라, 고려, 조선의 범종)은 일본 각지에 50여 점이 남아있고(최응천, 2007), 고려의 대장경도 상당수 전래되어 일본의 중요문화재로 등록되어 있습니다(바바 히사유키馬場久幸, 2003).


이것들이 어떻게 일본에 흘러들어갔는지는 불확실하지만, 조선왕조실록에는 일본에서 예물을 바치고 대장경, 불구, 종, 조사의 초상화 등을 하사받아갔다는 기록들이 꽤 있습니다. (조선왕조실록 웹사이트 sillok.history.go.kr 에서 '일본, 대장경'으로 검색해보면 111건의 기사가 검색됩니다. 기록이 조선 전기에 집중되어 있고, 후기에는 나타나지 않네요.) (고려의 선승 나옹화상의 초상화를 주었다는 기록이 몇 있는데, 일본 어딘가에 남아있는 게 없을지... 궁금해지네요...)



이달에 일본 관서도(關西道) 구주(九州)의 탐제(探題) 원도진(源道鎭)이 사람을 시켜 예물을 드리고 《대장경(大藏經)》을 구하였다.
是月, 日本 關西道 九州探題源道鎭, 使人獻禮物, 求《大藏經》。
태조실록 12권, 태조 6년 12월 29일 정미 4번째기사


전 서운관 승(書雲觀丞) 김협(金浹)을 보내어 대내전(大內殿) 다다량덕웅(多多良德雄)에게 보빙(報聘)하게 하고, 《대장경(大藏經)》 1부(部), 나옹(懶翁) 화상(畫像)·중종(中鍾) 1건(件), 홍묵전모(紅墨氈帽)·호표피(虎豹皮)·암수 염소[雌雄羔] 2쌍(雙), 발합(鵓鴿) 5대(對), 안자(鞍子) 1면(面), 화(靴)·혜(鞋)·송자(松子)·화석(花席)·주포(紬布)·면포(綿布)를 주었다.
丙子朔/遣前書雲觀丞金浹, 報聘于大內多多良德雄, 賜以《大藏經》一部、懶翁畫像、中鍾一事、紅墨氈帽、虎豹皮、雌雄羔二雙、鵓鴿五對、鞍子一面、靴鞋、松子、花席、紬布、緜布。
태종실록 16권, 태종 8년 8월 1일 병자 1번째기사 1408년 명 영락(永樂) 6년


일본 대내전(大內殿)의 사자 주정(周鼎) 등이 예궐하여 하직하니, 임금이 정전(正殿)에 나아가 불러 보고 위로하였다. 또 《대장경(大藏經)》 1부(部), 보리수엽경(普提樹葉經) 1엽(葉), 나발(螺鉢)·종경(鍾磬) 각 1개와 조사(祖師)의 초상과 나옹화상(懶翁和尙)의 화상을 특별히 하사하였으니, 덕웅(德雄)의 청구에 따른 것이었다.
日本 大內殿使者周鼎等, 詣闕辭, 上御正殿, 召見而勞之。 且別賜《大藏經》一部、《普提樹葉經》一葉、螺鉢鍾磬各一事、祖師眞、懶翁和尙影子, 從德雄之求也。
태종실록 17권, 태종 9년 윤4월 26일 무진 3번째기사 1409년 명 영락(永樂) 7년


일본 국왕(日本國王)이 사신을 보내어 토물(土物)을 바쳤으니, 《대장경(大藏經)》을 구하고자 함이었다. 대내전(大內殿) 다다량 덕웅(多多良德雄)이 사자를 보내어 수레[輿]와 병기(兵器)를 바쳤으니, 또한 대장경을 구하고자 함이었다.
日本國王遣使來獻土物, 求《大藏經》也。 大內殿 多多良德雄遣使來獻輿及兵器, 亦以求《藏經》也。
태종실록 22권, 태종 11년 10월 21일 기유 2번째기사


일본 국왕(日本國王)의 사신과 대내전(大內殿)의 사인(使人)이 돌아간다고 고하니, 임금이 경연청(經筵廳)에 나아가서 인견(引見)하고,
"너희 왕이 양수(梁需)를 겁박하고 노략질한 도적을 끝까지 토벌할 뜻을 보이니, 내가 심히 기뻐하고 감사한다."
하니, 사인이 대답하였다.
"우리 왕이 《대장경(大藏經)》을 구합니다."
이에 1부(部)를 주라고 명하였다.
丁亥朔/日本國王使及大內殿使人告還, 上御經筵廳引見曰: "爾王示以究討刦掠梁需之賊, 予甚喜謝。" 使人對曰: "吾王求《大藏經》。" 乃命賜一部。
태종실록 22권, 태종 11년 12월 1일 정해 1번째기사


일본국 구주 도원수(九州都元帥) 우무위(右武衛) 원도진(源道鎭)이 사람을 보내어 토산물을 바치고, 《대장경(大藏經)》과 대종(大鐘)을 구하였다. 전평전(田平殿)과 원성(源省)도 또 도진의 인편을 이용하여 토산물을 바쳤다.
日本國 九州都元帥右武衛源道鎭遣人獻土宜, 求《大藏經》及大鏞, 田平殿 源省亦因道鎭使人就獻土宜。
세종실록 10권, 세종 2년 12월 8일 임인 3번째기사 1420년 명 영락(永樂) 18년



여기에 더해, 아예 '대장경판'을 달라고 요구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아래의 기사를 읽어보면, 대장경판을 원하는 일본의 분위기와 숭유억불을 기조로 한 조선 조정의 분위기를 알 수 있죠. 팔만대장경판은 1본 밖에 없으며 나라 안팎에서 보물로 여겨지는 것이지만, 일본에 선뜻 주지 못하는 이유는 '그다지 아낄 물건은 아니지만 일본의 요구를 다 받아들여줄 수는 없다'는 것이라고 논의하는 부분이 재미있네요. 반면 일본은 경판을 한 번 주면 이렇게 번거롭게 인쇄본을 매년 부탁드리지 않아도 되니 서로 편하지 않겠느냐고 설득하는 부분도 인상적입니다.



일본 국왕의 사신 규주(圭籌)·범령(梵齡)과 도선주(都船主) 구준(久俊) 등 1백 35인이 대궐에 나아가서 토산물을 바치니, 임금이 인정전에 나아가서 예를 받은 뒤에, 규주와 범령은 대궐 안에 들어오도록 명하고, 구준은 대궐 밖에 있도록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너희들이 지난해에는 바닷길에 탈 없이 고국으로 돌아갔고, 이제 또 무사히 왔으니, 내 몹시 기쁘노라. 국왕이 나의 요청을 기다리지 않고 여러섬에 피로(被擄)된 사람을 찾아서 돌려보내 주니, 실로 희열(喜悅)하여 마지 않는다."
하니, 규주 등이 대답하여 아뢰기를,
"피로되었던 사람 중에 과군(寡君, 일본 국왕을 지칭) 의 글속에 실려 있지 않은 자는 회례사의 말로써 찾아 보낸 것이옵니다."
하였다. 임금이 또 말하기를,
"국왕이 요구한바 대장경판(大藏經板)은 우리 나라에 오직 1본 밖에 없으므로 요청에 응하기 어렵고, 다만 밀교대장경판(密敎大藏經板)과 주화엄경판(註華嚴經板)과 한자대장경(漢字大藏經)의 전부를 보내려고 한다."
하니, 규주 등이 대답하기를,
"과군이 해마다 사람을 보내어 경을 청하는 것으로써 번쇄(煩瑣)하지나 않을까 염려하고 있으나, 한번 경판을 하사하시면 뒤에는 경판을 청구하는 번거로움은 없을 것이오며, 밀자(密字)는 과군이 본래 해독하지 못하오니, 만약 한자본을 하사하심을 얻는다면, 과군이 반드시 진심으로 감사하고 기뻐할 것이며, 신이 사절로 온 것도 함께 영광된 빛이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한자판은 조종조로부터 서로 전하는 것이 다만 1본뿐이다. 만약 겹쳐서 여러벌 있다면 국왕에 대하여 굳이 아끼어 주지 않으려는 마음이 있겠느냐."
하니, 규주 등이 대답하여 아뢰기를,
"성상의 하교가 자상하시니 깊이 감사하고 깊이 감사하옵니다. 신들도 또한 잘 헤아려서 아뢰겠나이다."
하였다. 임금이 내관에게 명하여, 사신과 부사(副使)는 육조의 조계청(朝啓廳)에서 음식을 접대하게 하고, 그 나머지의 객인(客人)은 동랑(東廊)과 서랑(西廊)에서 접대하게 하였다. 임금이 대장경판은 무용지물인데, 이웃나라에서 청구한다 하여 처음에 이를 주려고 하매, 대신들이 논의하여 말하기를,
"경판은 비록 아낄 물건이 아니오나, 일본이 계속 청구하는 것을 지금 만약에 일일이 좇다가, 뒤에 줄 수 없는 물건을 청구하는 것이 있게 된다면, 이는 먼 앞날을 염려하는 것이 못됩니다."
고 하기 때문에, 임금이 그 청구에 응할 수 없다고 답한 것이다.
세종실록 22권, 세종 5년 12월 25일 임신 1번째기사 1423년 명 영락(永樂) 21년


일본이 고려의 팔만대장경을 구해간 것은 조선시대에 들어 갑자기 나타난 일은 아니고, 고려사에도 관련 기록이 나옵니다.


일본(日本)에서 사신을 보내어 장경(藏經)을 구하고, 이어 토산물을 바쳤다.
日本遣使求藏經, 仍獻方物.
고려사 恭讓王 4年 1392년 6월 10일(음) 경신(庚申)



이런 기록들로 대장경, 종, 불구, 그리고 조사(祖師)의 초상화 등 일본이 한국의 불교 문화를 많이 수입해갔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조선에서 일본에 불화를 하사했다는 기록도 존재하는데요. 시기가 조선 초 15세기인 만큼, 고려 불화였을 가능성도 있겠습니다.


주서(注書) 노분(盧昐)을 보내어 도은(道誾)에게 유시(諭示)하기를,
"스님이 지난해에 내조(來朝)하였고 지금 또 왔으니, 그 충성과 정성이 가상하다. 더구나 스님은 연세(年歲)와 덕(德)이 모두 높고 뛰어나니, 내가 마땅히 친히 인견하고 예(禮)로 대우해야 할 것이나, 다만 일의 연고로 인하여 여의(如意)치 못하게 되었다. 이제 여래 현상도(如來現相圖)와 관음 현상도(觀音現相圖)의 2도(圖)와 서첩(書帖) 등의 물품을 주겠다."
하고, 또 문신(文臣)들로 하여금 시(詩)를 지어 전별(餞別)해 보내게 하였다. 그리고 부관인(副官人) 원암주(圓庵主)와 반종인(伴從人) 등에게도 물품을 차등있게 내려 주었다.
遣注書盧昐諭道誾曰: "師昔年來朝, 今又來, 忠款可嘉。 況師年德俱邁, 所宜親見禮待, 第因事故, 不得如意。 今贈如來觀音現相二圖, 及書帖等物。" 又令文臣爲詩送行。 副官人圓庵主及伴從人等, 亦賜物有差。
"일본 중 도은에게 불화와 서첩 등을 하사하다" 세조실록 41권, 세조 13년 3월 7일 임신 3번째기사 1467년 명 성화(成化) 3년


이처럼 고려 말, 조선 전기에는 생각보다 자주, 흔쾌히 일본에게 불교 문화 예술품을 선물하거나 하사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기록에 나오는 일본 승려 도은(道誾)은 대마도에서 온 것으로 보이는데("대마주(對馬州)의 종정성(宗貞盛)이 중[僧] 도은(道誾) 등을 사신으로 보내어 진향(進香)하였다." 세종실록 114권, 세종 28년), 대마도가 왜구의 본거지였던 점 때문에 그곳에 남은 한국 유물은 흔히 왜구의 약탈의 흔적으로 보는 경향이 있죠. 그렇지만 이런 기록을 통해 꼭 그렇지는 않을 수 있다는 것이 확인됩니다.



반면에 조선에서는 불교 문화재가 많이 소실되었는데, 그 이유는 숭유억불과 전란이었습니다.


숭유억불의 분위기가 퍼지면서, 많은 사찰들이 폐사되었고, 유생들에 의해 불상과 경전이 훼손되는 경우도 적지 않았습니다. 폐사된 사찰의 목재와 기와는 관사나 향교 등의 자재로 사용되었고, 폐사의 범종은 녹여져 화폐, 무기, 금은 세공 등에 사용되었습니다(이병희, 2011). 여기에 외침과 전란이 더해져 한반도에서 16세기 이전의 불화를 찾기란 몹시 어렵습니다(조선 전기 불화 역시 상당수가 일본에 있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일본에 넘어간 고려와 조선 전기의 불화들은 다행히 오늘날까지 살아남아 우리에게 한국 미술의 가장 화려하고 섬세한 면목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고려 불화와 조선 초의 불화는 일본 불화에도 어느 정도 영향을 미칩니다. 어떤 불화들은 일본에서 동일한 형태로 모사되거나, 목판화로 제작되기도 하죠.




<오백나한도>, 고려 후기, 일본 지온인 소장 | 일본에서는 19세기 에도시대에 이 그림의 목판화 모사본이 만들어지기도 했다.




<오백나한도> 부분, 고려 후기, 일본 지온인 소장(왼쪽) | <오백나한도> 목판화 부분, 일본 에도시대 19세기, 고판화박물관(오른쪽)



<아미타팔대보살도>, 고려 후기, 일본 엔랴쿠지 소장(왼쪽) | <아미타팔대보살도>, 일본 17세기, 미타니게문고(三谷家文庫) 구 소장. 왼쪽의 작품을 모사한 것이다. 일본 불화에서 전통적으로 허공장보살의 지물을 보주로 그린 것에 비하여, 칼을 든 것으로 그린 것은 고려 불화를 충실히 모사한 증거이다(양희정, 2008).



<석가탄생도>, 조선 15세기, 일본 혼가쿠지(本岳寺) 소장 | 일본에서는 에도시대에 이 그림의 모사본을 많이 그렸으며, 현재 18점의 모방작이 남아있다고 한다.



13-15세기 일본에서는 한국 뿐만 아니라 중국의 불교 미술도 활발히 수입했습니다. 특히 중국 동남부의 항구 도시 '영파'에서 제작된 불화들을 많이 수입했고, 그곳의 불화 전문 화가들과 작품에 대한 기록과 유물은 오직 일본에서만 전해지고, 중국에서는 기록을 찾을 수 없는 경우도 많을 정도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상황은 고려 불화를 중국 불화로 오인하게 되는 원인이 되기도 하는데요. 이에 대해서는 다음에 정리해보겠습니다.





참고문헌


국립중앙박물관, 고려불화대전 = Masterpieces of GORYEO BUDDHIST PAINTING, 국립중앙박물관, 2010.

한국미술연구소, 高麗時代의 佛畵 : 도판편, 시공사, 1997

한국미술연구소, 高麗時代의 佛畵 : 해설편, 시공사, 1997

바바 히사유키(馬場久幸), "고려판대장경의 일본 전존에 관한 연구." 한국종교 27, 2003

양희정, "고려시대 아미타팔대보살도 도상 연구", 미술사학연구(구 고고미술), 2008

이병희, "조선전기(朝鮮前期) 사찰(寺刹)의 망폐(亡廢)와 유물(遺物)의 소실(消失)." 불교학보 59, 2011

최응천, "日本에 있는 韓國 梵鐘의 종합적 고찰." 동악미술사학 8, 2007

홍선표, "고려 초기 회화의 조명", 미술사논단, 2019

Lippit, "Goryeo Buddhist Painting in an Interregional Context" Ars Orientalis 35 (2008): 192-232.


박상현, "고려 오백나한도 본뜬 19세기 일본 목판화 발견", 2019, https://www.yna.co.kr/view/AKR20190422113700005

어현경, "엔략쿠지 소장 아미타팔대보살도", 불교신문, 2016, http://www.ibulgyo.com/news/articleView.html?idxno=149663

허윤희, “조선 ‘석가탄생도’… 日 에도시대 모방작만 18점”, 2021, https://www.chosun.com/culture-life/culture_general/2021/02/11/CRUFUHBXRBHH5NUPXH6RVRXSHM/


* 이 글은 아래의 학위논문의 일부를 바탕으로 쓰여졌습니다.

김상규, <고려 불화를 재해석한 일러스트레이션 연구>, 석사학위논문, 서울대학교, 2023.02. (예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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