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 셋 엄마이기보다는 교사 000이고 싶은...
<2024 혁신아카데미 첫 번째 글 / 나는 교사로서 어떤 길을 걸어왔나요?> 를 옮겨 왔습니다.
12년의 학창시절+23년 교사생활,
17년만의 일상 탈출!
교사가 되어 학교에 다닌지 23년 만에 나는 잠시 학교를 떠나 지낼 기회를 얻었다. 서울교육연구년교사로서의 1년 중 절반의 시간은 교육청에서 일반직 공무원과 같이, 나머지 절반은 학교 밖에서 학교를 관찰하고 기록하며 보냈다. 올해 2월 다시 학교로 돌아올 준비를 해야 했을 때 약간 긴장했던 것도 사실이다. 3월에 만나는 사람마다 “다시 학교 적응하기 힘들지?”라고 물었지만 난 사실 ‘이렇게 아무렇지도 않다고?’ 하는 생각이 들 만큼 다시 학교의 일상으로 훅 들어와 있었다. 그래, 내 몸이 학교를 기억하고 있었다. 나는 언제나 ‘교사’였다.
학교에 있었던 25년 중 연구년 1년을 제외하면, 출산과 육아휴직 등으로 학교를 떠났던 시간은 채 2년이 되지 않는다. 19년째 아이를 키우고 있는 세 아이의 엄마이기도 하지만 나의 정체성은 언제나 ‘교사’였다. 내 몸이 아파서 조퇴하는 일은 있어도 아이가 열이 나서 조퇴를 해 본 일은 거의 없는 매정한 엄마였고, 육아휴직을 하고 알게 된 온갖 영유아 교육 교재마저도 학교에서 어떻게 활용할까를 생각하며 바라보았다. 아이 셋을 어린이집과 학교에 맡겨두고 3년 연속 6학년 담임을 맡고, 학교에선 일을 마다하지 않았던, 워킹맘 교사가 나다.
좋은 선생님이 되려고 두리번거리다.
교대에서까지 성실한 학생으로 살았던 나는 학교에 가기만 하면 좋은 선생님이 될 줄 알았다. 하지만 ‘내가 배운 것, 내가 만났던 선생님’들을 따라 하는 정도밖에 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는 데에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졸업한 지 10년이 지난 초등학교는 내가 다닌 국민학교에서 이름만 바뀌어 있는 것 같았다. 그래서 나는 학교 밖을 두리번거리기 시작했다. 내가 배우지 않은 새로운 것을 가르쳐 줄 곳이 어딘가 있을 것 같았다.
지도서 말고 학급 운영 아이디어를 얻을 수 있었던 월간 「우리교육」이 있어 참 다행이었다. 학급에서 해마다 반복하는 많은 활동은 ‘정애순 선생님의 학급경영’ 꼭지에서 배운 것이다. 「우리교육」은 학년별로 다양한 교과활동을 소개하기도 했다. 매월 받아보며 활용했던 2000년대 「우리교육」과 「우리아이들」이 아직도 우리집 책꽂이 하나를 차지하고 있다. 여기저기 혼자 두리번거리던 나는 (아마도 우리교육에서 소개했을) 전교조 연수를 찾아 수강하기도 하고 그 시절 막 퍼지기 시작한 홈페이지를 검색하다 인디스쿨과 전교조에 가입했다.
전교조 조합원이 되었다. ‘홈페이지 가입’쯤으로 생각했던 것 같다. 한 달쯤 지나서인가 출근부 도장 찍으러 교무실에 들어갔는데 수군수군 뭔가 심상치 않았다. 나중에 교실로 친목회장님과 교대동문회장님이었던 선배 선생님들이 전화하셨는데 모두 ‘전교조에 왜 가입했냐’고 물으셨다. 그게 동학년도 아닌 지긋한 선배님들이 전화하실 일인가 좀 의아해하며 ‘교육 자료랑 연수 좋은게 많아서요.’라고 대답했다. ‘순진하고 시키는 대로 잘하는 것 같았던 신규가 이상해졌어.’라고 생각하기 시작했을지도 모르겠다. 난 정말 ‘이상한 신규’가 되었다. 4년차엔가 학교운영위원회 교원위원 선거에서 운영위원으로 당선이 되었으니.
2001년에 전교조에 가입하고 2006년에 첫 아이를 낳기 직전까지 나는 퇴근하고 곧장 집에 가는 일은 거의 없었다. 갈 곳이 너무 많았다. 지역에서 요일마다 다른 주제로 공부하는 모임에 참석해서 학교에서 배운 적 없는 ‘우리 음악’도 배우고, ‘학년 교육과정 연구’ 모임에도 참석해서 ‘교육과정 재구성’을 만났다. 꿈꾸던 방학 중 해외여행은 뒤로하고 전교조 선생님들과 여름이면 숲속학교 캠프 진행, 겨울에는 참교육실천대회 등 행사를 하며 ‘새로운 교사’로서의 나를 계속 채워갔다.
아련한 첫사랑, 혁신학교
진보교육감의 시대가 왔다.
첫 아이를 키우며 학교와 어린이집, 우리 집을 반복하며 독박 육아와 직장생활을 겨우겨우 병행하고 있던 때였다. 방배동 연수원에서 ‘혁신교육아카데미’가 열렸다. 학교 밖 인사들이 말하는 교육에 대한 이야기에 마음이 설렜다. 경기도에서 시작된 혁신학교를 책으로, 영상으로 수도 없이 엿보았다. ‘엄마’가 아니라 ‘교사’로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불쑥 올라왔다.
2010년이었나, 근무하던 학교에서 교장공모제를 하게 되었는데 소견 발표를 통해 감동과 울림을 주셨던 분이 교장으로 부임하셨다. 규모가 꽤 컸던 학교 맨 구석의 1학년 교실을 찾아오셔서 교장선생님이 하셨던 순간을 떠올리면 지금도 심장이 울린다.
“서 선생, 서울형 혁신학교 신청해보려고 하는데, 도와줄 수 있겠어요?”
학교에서 또래 교사들과 혁신교육동아리를 신청해 이런저런 공부는 하고 있었지만, 우리 학교가 혁신학교가 된다니, 정말 두근거렸다. 예비혁신학교 직무연수 진행 요원을 맡았다. 진행요원이라 직무연수 인정도 안 되고 각종 심부름 업무를 해야 했지만 그저 행복했다. 교육청 연수에서는 만나보지 못한 강사들을 만났고, 강의를 듣는 내내 벅차올랐다. 교장선생님이 강사로 계획된 시간에는 전체 교사들이 우리 학교의 비전과 학교상을 함께 나누었다. 어리둥절할 만큼 낯선 경험이었다.
혁신학교를 준비하는 과정 내내 너무나 감격스럽고 즐거웠지만, 나는, 거기까지였다.
진보교육감의 시대는 기다리고 기다리던 둘째와 함께 왔고, 연이어 만나게 된 막내아이를 낳느라 1기 혁신학교인 우리 학교를 나는 거의 구경하는 수준에서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학교를 이동해야 하는 시기가 되었고, 세 아이를 둔 나는 ‘혁신학교 전사’이기 보다 ‘엄마’여야 했다. 첫 아이가 초등학교에 입학하는 해에 내가 사는 지역의 일반 학교로 이동하게 되었다. 이루지 못한 짝사랑에 미련 가득한 사람처럼 ‘혁신학교’는 가슴 한편에 묻어두어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