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냥 사는 거지. 이런 날도 있고 저런 날도 있고.
유독 힘든 한 해가 있다. 올 한 해가 그랬다. 안 좋은 일이 연속적으로 일어났다. 멘탈을 잡고 있기 힘들었고 마음은 한없이 무너졌다. 그래도 이만큼 살아왔다고, 과거에는 더 힘든 일도 겪었는데 이것도 다 시간이 지나가면 해결될거라 생각하며 버텼다. 땅을 파고 무너지지는 않았다. 찢어진 마음과는 별개로 표정은 평온했으며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일상생활을 잘 수행했다. 하지만 집중력이 무너지고 멍해지고 짜증이 많아지는 것은 어찌할 수 없었다. 컨트롤 불가였다. 그럴수록 정신을 더 잡으려고 애썼다. 그런데 그럴 때마다 자신이 너무 미워졌다.
그렇게 상반기를 지내고 하반기에 왔다. 그렇다면 나는 괜찮아졌는가? 아니, 아니다. 버티는데 힘을 너무 쏟은 걸까. 무너지지 않으려고 아등바등 악을 써서 그런 걸까. 온몸에 힘이 빠졌다. 집중력은 더 안 좋아졌고 그럴수록 실수도 많아졌다. 일이 더 힘들어진 것도 한몫했다. 올 초만 해도 쉼 없이 달려야지 생각했었는데 이젠 걸을 힘도 남지 않았다. 어떤것에도 에너지를 쓰고 싶지 않았다.
힘들수록 힘듦에 빠지지 않으려고 일을 이것저것 벌렸다. 덕분에 새로 시작한 것들도 많다. 지금은 내가 벌려 놓은 일들 사이에서 허우적거리고 있다. 무언가를 벌려 놓기는 했지만 그것들로 인해 힘이 나지는 않았다. 그 그럼에도 문득문득 틈이 생기면 마음은 또 가라앉았다.
이 상태에서 벗어날 방법을 생각했다. 하지만 당장은 저항할 힘도 없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흘러가는 대로 지내는 것일 뿐, 닥친 일들을 해결하는 것일 뿐이었다. 이 흐름을 거슬러 오르기 위해서는 아주 큰 힘이 필요한데 지금은 그럴 힘이 없다. 이게 결론이었다.
자신을 애틋하게 생각한다는 것이 좋은 건 줄 알았다. 나는 항상 내가 애틋했다. 그래서 완벽하고 싶었다. 나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은 완벽했으면 좋겠고 내 선택은 항상 후회가 없었으면 좋겠다고 바라왔다. 그런데 산다는 건 변수와의 싸움이었다. 내 완벽에 금이 하나 둘 갈수록 난 그걸 용납하지 못했다. 인생 그럴 수도 있어. 인생은 뜻대로 되는 게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도 내 인생만은 뜻대로 되길 바랐다. 그리고 그게 안되면 전부 내 탓을 했다. 내가 못나서 그렇다고. 사람은 자신을 더 사랑할수록 자신을 더 미워하게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알았다.
전에도 꽤 힘들었던 적이 있었다. 그때는 직장에서도 표정관리가 안되었었는지 다들 나를 보며 무슨 힘든 일 있냐고 한 마디씩 물었다. 그리고 나는 급기야 그만두겠다는 말을 입 밖으로 꺼냈다. 그때 상사 분의 말이 지금 생각난다.
" 뭘 그만둬, 그냥 다녀. 회사 나온다 생각하지 말고 그냥 놀러 온다고 생각해. 친구들 만나러 온다고 생각해. 그러고 그냥 다니면 안 돼?"
그때는 그 말이 하나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난 잘하고 싶은데 그냥 놀러 온다는 마음으로 출근하라니. 내 생각에 반하는 말이었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알았다. 어쩌면 그렇게 힘을 빼는 것이 답일 수도 있다는 것을.
때로는 아무 생각 없이 흘러가는 대로 사는 것도 필요하다. 힘이 없는데 억지로 달리려고 한다고 달려지는 것도 아니다. 한 친구가 이런 말을 했다.
" 넌 네모난 바퀴를 굴리는 것 같아."
이제는 인정하기 싫지만 몸도 예전 같지 않다. 체력도 관리를 해줘야 하는 나이가 되었고 한 끼만 못 먹어도 다음날 까지도 기운이 하나도 없다. 주저앉았는데 다시 걸을 힘이 없다면 잠시 그대로 있어도 된다. 그래도 내가 살던 관성이 있어도 또 그런대로 하루는 굴러갈 것이다.
굳이 액셀을 밟지 않아도 기어를 드라이브로 놓으면 아주 느린 속도지만 차는 앞으로 나아간다. 그리고 후진기어를 놓지 않는 이상 뒤로 저절로 뒤로 가지는 않는다. 사람에게도 저마다의 기어가 있다. 몇십 년 인생을 사는데 한결같이 열심히 살 수도 없고 힘이 날 수도 없다. 잠시 속도를 늦출 때이다. 그랬다가 힘이 나면 다시 달리면 된다. 사실 아무 생각 없이 살아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단지 내가 원하는 자아상이 있는데 그 욕심을 못 채우는 것 뿐이겠지. 세상은 여전히 똑같고 내가 조금 쉬어가도 걱정할 만큼의 일들은 일어나지 않는다. 그걸 알면 힘들 때 힘을 빼는게 두렵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