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내 괴롭힘으로 부서 이동을 하게 되었다. 이동 전에 그만 둘까 말까를 수도 없이 고민했다. 사실 마음은 떠난지 오래다. 지금도 떠났다. 그렇게 마음이 떠난 곳에 몸만 매일 출퇴근을 한다는 것이 이제는 이 회사에도 민폐를 끼치는 것 같았다. 그정도로 내 마음은 이제 이곳에 아쉬움 한 톨 남아있지 않았다. 아니, 아니다. 이렇게 말하면 안된다. 왜냐면 여전히 돈이 내 발목을 잡고 있기 때문에. 어쩌면 내가 지금까지 퇴사를 고민하며 말을 꺼내지 못하고 있는 것도 다 돈 때문이다.
부서 이동을 해서 이제 가해자가 사라졌다. 하지만 정말 모든게 끝난걸까. 아니다. 난 많은게 달라졌다. 난 피해자인데 이상하게 당당하지 못했다. 기가 죽어 있었다. 그리고 마음 깊숙한 곳 저 아래에는 이런 생각들이 헤엄치고 있었다.
' 여기 사람들도 날 반가워하지 않겠지' , '나한테도 문제가 있으니까 괴롭힘을 당한거 아닐까?' , '지금 벌써 몇번째야.. 난 사회에 맞지 않는 사람인가..' , '내가 이렇게 행동하면 또 전과 같은 이유로 욕을 먹겠지..' , '저 사람도 나를 그때 나를 괴롭히던 사람처럼 생각할거야' 등등.
수도 없이 많은 생각들이 나를 괴롭혔다. 일부 사람들은 어두운 나를 불편해 하는 것도 같았다. 하지만 더이상 표정을 컨트롤 할 힘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억지로 텐션을 끌어올렸다. 분명 그전에도 텐션이 높았던 것은 아니지만 내 원래 텐션 정도도 부자연스러웠다. 아무 힘이 없는데 힘이 있는 척 하며 다니고 있다. 상담도 받았다. 그런데 나를 반항하는 직원, 사회 생활에 '적당히' 적응하지 못한 사람으로 일정부분 보는 시선은 피할 수가 없었다. 정신과 의사가 한 말이 정말 기억에 남는다.
"괴롭힘은 그냥 본인 생각인거죠? 객관적인게 아니라. 저랑 약속할 수 있어요? 앞으로 다른데 가서는 본인의 선입견을 없애기 위해서 윗사람한테 겉으로라도 비위 맞추고 잘해보겠다고. 그 사람이 별로라도 적당히 잘 했으면... 자갈로 바위를 치면 자갈이 깨지죠.."
나는 자갈이었나. 그런 생각을 한번도 해본 적 없다. 잘못된 행위라고 생각했고 그 불합리함을 내가 참을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매번 적당히 참고 견디고 숙이고 하면 모든게 만사 오케이가 되는건가. 실제로 한번도 반항한 적 없다. 토 한번 단 적 없다. 마지막에 딱 한번 내가 하고 싶은 말을 했다. 그조차 반항이 아닌 지금 내 상태와 그동안의 괴롭힘에 지쳤으니 그만해달라는 신호를 보낸 것이었다. 그들이 했던 것처럼 나도 그들처럼 지속적으로 뒤에서 험담하지도 않았다. 그들이 안보이는 곳에서 그들을 생각할만큼 그들에게 관심조차 없었다. 하지만 참을수록 그들은 선을 넘었다. 물론 그 선조차 나의 기준이다. 누군가는 그정도도 넘어갈 수 있다. 집에가서 맥주 한캔 까고 말 수 있다. 하지만 이런 일을 한번 겪었을 때 느낀게 있다. 참는게 답은 아니다. 나를 해치는 시간을 참는게 답은 아니다. 나 자신을 잃으면서까지 지켜야할 그 무엇도 없다. 그래서 결심했다. 또 한번 그런 순간이 온다면 필사코 도망치기로. 그리고 나는 정말 도망쳤다.
그 이후 요즘은 일하는 동안 타인을 너무 의식하게 된다. 그러니 당연히 긴장이 되고 자세도 낮춘다. 내가 괴롭힘을 당한 이유 중 하나가 소위말해 윗사람인 나에게 기지 않았다는 거였다. 나도 모르게 기게 된다. 그리고 그런 내 모습을 보는게 토나오게 역겹다. 억지 웃음과 억지로 잘해보려는 노력과 나로 아닌 나로 하루에 8시간 이상을 고군분투하는 모습이 너무 역겹다. 그렇다. 이런 역겨운게 사회 생활일지 모른다. 내가 역겹다고 표현하면 누군가는 그게 바로 사회 생활이다 라고 말할 것이다. 하지만 적어도 나는 견디지 못하는 사람이다. 억지로 올라가는 톤과 억지로 공손해진 말투와 내 목소리와 내 감정 내 표정으로 살 수 없는 순간들이 길어질수록 숨이 막혔다.
최근에 혈액 검사를 했는데 모든 수치가 스트레스 호르몬에 의해 비정상적으로 치솟았다. 잠도 잘 수 없었다. 잠을 자고 일어나도 잔 것 같지 않았다. 분명 사람들하고 잘 어울리고 큰 갈등 없이 지냈었는데 이런일이 터지고 보니 그동안 감정이 상했던 자잘한 관계들이 생각났다. 그리고 또 돌아갔다. '내가 문제인가봐..'
그래서 나는 지금 어떻게 하고 싶냐.. 도망치고 싶다. 필사적으로 어디로든 도망치고 싶다. 돈이고 뭐고 밥을 굶고 뭐고 도망치고 싶다. 어제 본 글귀 하나가 떠오른다. 나로 살면 절대 가난해지지 않는다
이 소용돌이와 이 굴레가 지겹다. 내 자신이 너무나 잘 안다. 원치 않는 길을 걸어가고 있기에 불행하다는 것을. 억지로 돈을 벌기 위해서만 살고 있기에 여기까지 무너졌다는 것을. 밖에서 억지로 웃다가 집에와서 우는 날들이 반복된다. 지금 인생은 나한테 맞지 않는 인생이다. 자잘한 상처들에 취약해진다. 평소같으면 생채기 조차 나지 않았을만한 것들에 깊게 패인다. 마치 가시가 다 빠진 고슴도치 같다. 최소한의 방어막마저 없어진 고슴도치. 하루에도 열두번 가방을 주문했다가 배송이 오면 반품하기를 10번째다. 분명 비정상적인 행동이다. 뭘 걸쳐도 뭘 입어도 초라해보인다. 이런 일 딱 당하기 좋은 사람처럼 생겼다. 숨 쉬는게 답답하다.
그렇다면 다시 나에게 묻겠다. 나를 해치는 상황이 오면 참지 않고 도망치겠다는 그 다짐은 여전히 유효한가? 아니면 인내로 돌아선건가? 여전히 유효하다. 사람마다 역치는 다르다. 누군가 나에게 직장에서 괴롭힘으로 그리고 죽을 만큼 힘든 상황에서 버틸까요 도망칠까요를 묻는다면 물론 그 이유를 자세히 들어보겠지만 그 이류를 막론하고 자신의 정신건강을 위협하는 일이라면 버티지 말고 도망쳐라 라고 말할 것이다. 버티는게 답이다 라는 말은 항등식이 아니다. 버티는게 답이 아닐 때도 많다. 물론 도망친 곳에 천국은 없다. 또 다른 힘듦과 새롭게 얻게되는 문제들이 많을 것이다. 지금의 나처럼 말이다. 그리고 피해자이지만 그럼에도 자아 성찰의 시간은 피할 수 없다. 그리고 그 시간이 꽤 고통스럽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까지는 도망친 것을 후회하지는 않는다. 단 도망칠 때 그 과정과 방법에 대해서는 많이 고민하라고 말하고 싶다. 도망에 좋은 방법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것또한 끝맺음이기에, 매듭 짓는 일은 언제나 중요한 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