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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이

by 동틀무렵

집에 있는 시간이 많다 보니 이제 택배기사 얼굴도 얼추 익어간다. 우체국 집배원과는 서로 인사를 나누고 우리 집 강아지 이름을 불러주는 사이가 되었다. 그중 어느 회사의 기사가 특히 눈에 들어온다. 아주 젊은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는 얼굴이 귀공자처럼 희고 곱상하다. 잘 차려입을 것도 없이 조금만 꾸며서 강남 어느 나이트클럽에 간다면 분명 그날의 주인공이 될 것 같다. 앳되어 보이니 결혼은 하지 않아 보인다. 다리에 문신인지 타투인지를 했지만 조금도 불량스러워 보이지 않고 오히려 멋들어지게 보인다. 어느 날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데 그가 수레에 짐을 한가득 싣고 현관에 들어왔다. 내가 먼저 타고 있었는데 먼저 가라며 같이 오르지 않는다. 얼마 전, 어느 아파트에서 ‘엘베 적당히 잡아 xxx야.’라고 택배 차량에 빨간 매직으로 욕을 써놓았다는 뉴스가 있었다. 그는 내가 미리 탄 엘리베이터에서 빈번히 층을 잡으면 폐가 되니 먼저 올라가라고 한 모양이다. 나는 배달하시는 분과 같이 탈 때, 중간에 엘리베이터를 멈추면 그들의 시간을 뺏는 느낌이 들어 미안한 생각을 하는데, 그는 반대의 생각을 하는 모양이다. 그렇게 심성도 고운 사람으로 보인다.


뜨거운 여름 한낮이다. 한 젊은이가 버스정류장 옆에서 조그만 트럭을 대어놓고 전기구이 통닭을 굽고 있다. 안 그래도 숨이 막히는 날에, 뜨거운 불 곁에서 콩죽 같은 땀을 흘리고 있다. 그의 피부와 얼굴은 관우의 얼굴빛이라는 대춧빛으로 건강해 보인다. 오븐 안에서 익어가는 통닭의 색깔도 그러하다. 통닭의 기름이 뚝뚝 떨어질 때, 젊은이의 얼굴에서도 굵은 땀방울이 떨어진다. 주인장의 손길은 바쁘나 통닭이 익어가는 것은 느리다. 손님이 없으니 느리게 익어가는 것이 다행이라는 생각에 마음이 쓰인다. 잠시의 틈에 주인장 젊은이는 길가 건물 차양이 주는 그늘에서 휴대전화를 들여다본다. 그늘이라고 해봐야 몸의 상반신만 간신히 덮을 정도이다. 고개를 숙이고 들여다보는 것은 그 일에 살짝 수줍어하는 마음이 있어서일까. 그러나 나는 그 모습에 속으로 경탄을 보냈다. 용기 있는 젊은이구나 하는 생각에 한 마리 살까, 하는 생각이 일어난다. 이 더위에 통닭 봉지를 들고 가는 것도 거추장스럽고 버스 안에 냄새를 퍼뜨리기도 민망한 일이다. 이런저런 생각이 머릿속을 맴도는데 버스가 도착했다. 십 분도 안 되는 짧은 시간이긴 해도 통닭은 오븐 안에서만 손님을 기다린 채였다. 사지 않은 미안함에 살 걸 하는 마음이 뒤늦게 따라왔다.

나의 세대, 지금의 오륙십 대를 ‘낀 세대’라고 한다. 부모님의 장수로 봉양 기간이 늘어나고 자식 뒷바라지를 오래 해야 한다고 그렇게 부른다고 한다. 그러나 나는 거기에 동의하지 않는다. 우리 세대는 풍족하지는 않아도 부모님 세대와 달리 배를 곯지 않았고, 고도성장의 혜택을 온전히 받은 세대이다. 웬만히 노력하면 번듯한 직장을 가졌고, 모든 쪽으로 문이 열려있었다. 부모님의 장수는 축복이니 더 말할 것이 아니다.

경제력에서 완벽하지 않으면 결혼도 못 하는 세상이다. 그것도 전문직이나 그럴듯한 대기업이 아니면 경제력이 아니라는 세태다. 내 선배 세대까지만 해도 직업 없이도 짝을 찾아 부부가 힘써 일하여 성가를 하는 일이 다반사였다. 단칸방에서 시작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지금은 어떤가. 번듯한 직업이나 직장뿐 아니라 살아갈 집도 상당한 수준으로 준비되지 않으면 결혼을 꿈꾸지 못하고 있다. 지금 젊은이들이 태어나고 자라난 환경을 훌쩍 뛰어넘어 용이 될 가능성은 희박하고, 축소된 기회에서 치열한 경쟁을 하는 것을 보면 안쓰럽기만 하다. 젊은이들 또한 편한 일만 찾는 세태지만, 거위의 배를 갈라 황금알을 한꺼번에 꺼내 버리고 제대로 된 가치관을 보여주지 못한 우리 세대의 잘못인가 하는 생각에 미안한 마음이 든다. 까닭을 따지는 것은 부질없고 정답도 없다. 나도 그 잘못의 한 역할이었고 사회 전반의 시스템이 그렇게 흘러가서 이제는 그리 돌아갈 뿐이다.

그런데 오늘 두 젊은이가 이런 내 생각이 틀렸다고 항변하는 것 같다. 모두가 편한 것만 찾는 게 아니라고, 남이 꺼리는 일도 용기를 가지고 덤비는 우리도 있다고 말하는 것 같다. 그들의 말에 오히려 내가 부끄러워진다. 부모님 덕에 편안하게 교육받고 안일하게 직장생활을 하며 그렇게 힘들지 않게 지낸 세월이었다는 생각에 부끄러워지는 것이다.

구인회, 이병철, 정주영 회장도 조그만 상점에서 출발해서 세계적 기업을 일구었다는 말은 건네지 못하겠다. 힘든 시절이 지나면 좋은 시간이 올 것이라는 공허한 격려도 하지 않겠다. 다만, 부모 등에 업혀 방황하는 젊은이가 늘어간다는 세태에서, 두 젊은이의 용기와 건강한 정신에 그들의 앞날이 밝기만을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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