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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이 쓰는 반성문

by 동틀무렵

동물 세계는 약육강식의 세계다. 먹이사슬은 거의 고정되어 있다. 낮은 곳에 초목이 있고 제일 꼭대기에는 맹수가 있다. 이 순서를 절대 거스를 수 없는 자연의 섭리라면 약자는 얼마나 억울한가. 그러나 조물주는 그렇게 어리석지 않다. 맹수도 죽음 후에는 자신의 육신을 땅으로 돌려주어 그 자양분으로 초목들을 커가게 한다. 엄격한 약육강식의 계층에서도 생태계의 순환으로 궁극에는 모두가 공평하다.


인간 세상에도 먹이사슬 같은 갑과 을이 존재한다. 서로 합의된 계약으로 맺어진 갑과 을의 관계는 매우 공정해 보이지만, 우월한 힘을 가진 갑의 무모한 짓으로 사회가 시끄러워지기도 한다. 자연생태계처럼 인간계의 갑과 을도 변치 않았다. 그러나 문명시대에서는 영원히 변치 않는 것이 없다. 누구나 항상 갑일 수만도, 을일 수만도 없다. 최고 권력자는 온전한 갑일까. 적어도 겉보기에는 국민이 갑이며 권력자는 을이다. 사회의 진보에 따라 을은 각성하기 시작했고, 나아가 최근에는 ‘을질’이라는 말까지 나오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을질이라는 말 자체는 성립할 수 없는 말이다. 을질하는 순간, 갑이 되기 때문이다. 즉, 행위를 뜻하는 ‘질’이라는 글자를 붙일 때는 ‘갑질’이라는 단어만 유효하다.


돌이켜보니 지내 온 시간도 갑이기도, 을이기도 했다. 굳이 따지자면 갑의 위치에 있었던 시간이 더 많은 것 같기는 하다. 상대해야 할 꽤 많은 을이 있었다. 나름대로는 을에게 갑으로 비칠까를 늘 경계했었다. 너무 가까이도, 너무 멀리도 않는 불가근불가원(不可近不可遠)을 지키고자 했다. 부하직원들에게는 밥 한 그릇도 얻어먹지 말고 오히려 대접하고 존중하라고 귀에 딱지가 앉도록 이야기했다. 그런데도 가끔은 갑질한다는 말이 들려오곤 했다.

갑의 위치에 있었던 시간이 지나고, 지금은 을의 위치에서 갑을 바라보고 있다. 갑의 위치에서는 그렇게 보자, 보자 해도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인다. 갑이 무심코 하는 일 하나하나에 을은 아프다. 연못 속에서 돌 맞는 개구리의 느낌을 어렴풋이 느낀다. 그러나 을은 억울해도 말을 아낀다. 돌아올 후환이 무서워서이다. ‘마이클 샌델’의 명저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책을 빌리자면 두 계약당사자가 완벽한 힘의 균형이 아닌 한 모든 계약은 공정할 수 없다고 한다. 서로가 합의하여 계약했더라도 강압과 강요가 끼어들 개연성은 얼마든지 있으며, 따라서 도덕성이 보장될 수 없다는 것이다.

인간 사회에서 어쩔 수 없이 형성되는 갑과 을의 관계를 공정하고 아름답게 할 방도는 없을까. 모든 계약서에는 마지막에 꼭 붙는 것이 있다. ‘본 문서에 없는 것은 신의성실에 따라 이행한다’와 같은 문구다. 세상일은 ‘문서 쪼가리’에 적힌 글자로만 명확하게 정리되지 않는 일이 많기 때문이다. 이렇게 갑과 을은 지배, 피지배의 관계가 아니라 신의와 성실함이 필요한 관계이며 호혜가 필요한 관계이다. 이런 것이 서로가 가져야 할 기본적 생각이 되어야 한다.

계약서에서는 서로의 이름을 생략하고 보통 갑과 을로 표기를 한다. 이것이 법은 아니나, 계약당사자의 명칭을 반복으로 기재하는 것이 번거로워서인지 그렇게 관습으로 굳어져 왔다. 관습을 깨어 갑, 을이라고 표기하기보다 서로의 이름을 기재한다면 대등하고 호혜의 생각이 좀 더 깊어 질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해본다. 큰 변화를 가져오지는 못하겠지만 다행히 그렇게 하는 경우가 늘어나고 있는 것 같다.

갑과 을의 관계는 조직 간에만 적용되지 않는다. 혼자라서 힘없는 을이었던 개인이 이제는 고객이라는 이름으로 갑이 되었다. 우리는 모두가 고객이므로 따라서 모두가 갑이다. 즉, 개인으로서 을은 존재하지 않는다.

최근에 생각지 않은 갑질을 했다. 오븐레인지에 밥을 데우고 문을 여니 연기가 확 피어 나온다. 깜짝 놀라 들여다보니 안에서 불꽃이 일어나고 있었다. 음식물을 놓는 철망 다리의 고무 패킹이 가열되어 불이 난 것이다. 고객센터로 전화해서, 이런 일이 아예 발생치 않도록 재질을 바꾸면 어떻겠냐고 건의를 할 참이었는데, 보상을 바라는 못된 고객이라고 판단했는지 상위부서로 떠넘긴다. 죄송하다는 말만 수십 번을 들었다. 의도와는 다른 답변에 을은 갑에게 무조건 고개를 숙여야 하는 것이 우리 사회의 규칙이 되어 버린 건가 싶어 안타까운 생각이 들었다.

얼마 전 LG전자에서 「담대한 낙관주의자들」이라는 책을 출간했다고 한다. 기업이 책을 출간했다는데 관심이 생겨, 우선 출판사 서평을 읽어 봤다. 그중 한 대목이다. ‘많은 이야기 중에 LG전자의 매출 목표 달성을 위해 엄동설한에 에어컨을 미리 매입해 둔 협력업체를 보고 충격에 빠진 LG전자 사람들은 옳은 길을 가기로 선택한다.’ 서평의 한 문장으로 전체를 온전히 이해하지는 못했지만, 갑과 을이 이런 관계가 되면 아무런 문제가 없겠다.

갑과 을은 적당한 거리를 지키며 상대를 역지사지(易地思之)하면 금상첨화다. 그러나 아무리 노력해도 온전히 상대의 처지가 되어서 이해하기는 어렵다. 지금 느끼는 나의 감정도, 만약 내가 지금 거기에 있었다면 나 또한 그리했을 것이다. 내가 나름 배려한다고 하면서 고심해서 했던 것도 역시 그때도 을에게는 돌멩이가 되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마음이 아프다.

계약당사자가 온전하게 대등한 힘을 가진 경우는 거의 없으니 한쪽은 강하고 한쪽은 약한 것이 대부분의 계약이다. 따라서 아무래도 약자인 을을 보는 갑의 인식이 더 중요하겠다.

을의 각성과 함께, 갑도 갑질이라는 멍에를 피하려는 아름다운 노력을 하고 있기는 하다.

이런 것들이 그나마 이 사회가 진보해 나가고 있음을 증거하고 있다. 그러함에도 을은 서럽고 아쉬울 수밖에 없는 것이 세상사다.

어쩌면 좋을까. 갑은 ‘존재 자체가 갑질’이라고 생각하면 또 한 걸음 앞으로 나갈 수 있을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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