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을 이어간다는 것은 어쩌면 자신의 공간을 확보하기 위한 투쟁의 시간일지도 모른다. 공간에는 물리적 공간이 있고 사회적 공간이 있으며 위치적 공간도 있다. 사무실처럼 경제활동이 일어나는 곳의 내 책상은 사회적 공간이자 위치적인 공간이며 동시에 물리적 공간이기도 하다.
일상에서 가장 직접적으로 체감되는 것은 물리적 공간이다. 우리는 늘 그런 공간 확보에 애쓰며 생활을 이어나간다. 애쓴다는 표현으로는 부족할 만큼 일상에서의 그것은 투쟁에 가깝다. 집은 가족이라는 공동체의 공간이긴 하지만, 온전히 나만의 공간이라고 하기는 어렵다. 그래서 사람들은 집 안의 방 하나를 자신의 것으로 선언하고 배우자나 자식이라 할지라도 노크를 해야만 하는 공간을 만들기도 한다.
그런 자기만의 공간이 없던 시절의 아이들은 다락방이나 골방을 유난히 좋아했다. 심지어 몸을 구겨야 들어갈 수 있는 벽장조차 자기만의 공간으로 삼기도 하였다. 다락도 골방도 벽장도 없었던 나는, 방 사이의 미닫이문을 떼어내 구석에 세워 나만의 공간을 만들며 놀았다. 아이들이 엄마의 자궁에 있던 시간을 무의식적으로 그리워한 것일지도 모르지만, 자기만의 오롯한 공간 확보는 인간의 본성 가운데 하나일 것이다.
그 본성에 충실한 공간이 있다.
오로지 내게만 집중할 수 있고 그 누구에게도 방해받지 않으며 아무도 침범할 수 없는 공간. 오롯한 공간의 결정체라 할 만하다. 그곳은 세상과 분리되어 지나치게 고요해 어떨 때는 외로움마저 느껴진다. 바로 인간은 혼자 있는 때만 온전히 그 자신일 수 있다는, 쇼펜하우어的 공간(?)이랄 수도 있다.
그곳은 신부(神父)에게 고백하는 고해성사의 방보다 더 은밀하다. 최루탄 매캐한 연기 속에서 허둥지둥 뛰어들던 명동성당이며, 삼한시대 소도(蘇塗)처럼 추적자를 따돌리는 신성한 도피처기도 하다. 모든 핑계가 허용되는 공간이며 때로는 죄를 지은 자들이 탈출을 노리며 옆눈으로 째려보는 곳이기도 하다. 거기는 특별히 번잡한 일도 두뇌를 써야 할 일도 없는 곳이어서 이내 심심해진다. 그러다 보면 공간 밖에서는 지긋지긋해하던 문자와 카톡 소리조차 반가워서 0.1초의 망설임 없이 반응하기도 한다.
오로지 본인만이 그 공간을 해제할 수 있는데, 극히 예외적으로 강제로 열리는 순간이 있기도 하다. 하지만 그런 일은 마동석의 그 무시무시한 주먹에 나쁜 놈이 저만치 나가떨어질 때 같은, 매우 이례적인 상황에서만 발생한다. 영화에서나 일어나며 현실에서는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그때 그 공간에 있던 이는 낭패를 보지만, 보는 이는 마구 웃음을 터트린다. 이를 보면 인간은 자신의 공간을 지키려는 본성보다 남의 공간을 몰래 들여다보고 싶은 본성이 더 큰가도 싶다.
전자회로는 Input이 있으면 반드시 Output이 있다. 뭇 생명도 그러하되 오직 사람만이 이 특별한 공간에서 그 규칙을 행한다. 마침내 몸속에 오래 갇혀 있던 것이 빠져나가고 비로소 호흡도 편안해진다. 무아지경에도 빠진다. 버려야 가벼워짐을 느끼는 순간이다. 하나의 일념으로 버틴 끝에 맞이하는 그 청량함, 온몸에 흐르는 전율 속에서 몸은 이완되고 머릿속은 가지런히 정돈된다. 이제 다시 타인과의 공유 공간으로 나갈 시간이다.
허무도 밀려온다. 허무는 虛하고도 無한 것이니 근심 또한 함께 사라진다. 그 공간에서의 행위의 결과로 발생하는 그 아무것도 아닌 덩어리 때문에 날마다 고민하는 사람도 부지기수라니, 그것이 근심이런가? 아무것도 아닌 덩어리가 근심이라면 세상사 근심이란 결국에는 아무것도 아닌 덩어리에 불과한 것이 아닐는지.
무릇 말씀에서는 ‘네 시작은 미약하나 그 끝은 창대하리라’라고 했다. 이 공간에서의 진리는 그 반대다. 이곳에서 만들어 내는 결과는 대개 시작은 창대하고 끝은 미약하다. 거스를 수 없는 이치다. 이 글도 철학적 사유를 흉내 내며 창대하게 시작했건만, 끝은 왜 이리 미약하고 허무한가.
그런 공간. 근심이 빠져나가는 공간. 解憂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