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사회의 52시간 근로시간 논쟁을 볼 때마다, 옛 직원 한 사람이 떠오른다. 그가 일하는 모습을 볼 때면 능력 있다, 라기보다 ‘경이롭다’라는 생각이 들곤 했다. 그때 우리는 경쟁사와 치열한 경쟁을 하고 있었는데, 그의 일은 매일 데이터를 취합, 가공하여 보고서로 만드는 것이었다. 그는 이른 저녁 식사를 하고 들어와 전국에서 보내온 데이터를 받아 일을 시작한다. 그가 엑셀 작업을 할 때면, 손가락이 벌의 날갯짓처럼 빨라 가끔 넋을 놓고 그 움직임을 바라보곤 했다. 그런 작업을 그는 늘 자정 무렵이면 끝냈다.
만약 내가 그 일을 했다면 아마 이틀 밤을 꼬박 새웠을 것이다. 그가 네 시간 만에 끝낸 일을 나는 이틀 밤을 새워야 한다고 가정해 보자. 과연 누가 더 열심히 일한 것일까. 내용을 제대로 알지 못하는 상사나 멀리서 피상적으로 바라보는 사람이라면, 아마 나는 ‘성실의 대명사’가 되고 그는 ‘뺀질이’로 보였을 것이다.
과거에는 흔히 근로자를 화이트칼라와 블루칼라로 나누었다. 화이트칼라는 주로 사무실에서 생각으로 일을 하는 부류들이다. 문제는 이들의 업무를 숫자와 시간으로 계량화할 수 있느냐 하는 데 있다.
내가 했던 엔지니어링 업무는 일을 계량화하기가 쉽지 않다. 경영진은 돈을 벌어오는 사업이나 영업부서를 중히 여기고, 기술·개발부서는 돈만 쓰는 부서로 인식하는 경향이 짙다. 혁신이나 비용 절감, 조직 효율화 등이 필요하면 맨 먼저, 아니 유일하게 도마 위에 오른다. 이때 등장하는 것이 MM(Man Month)이라는 단위다. 하루 8시간, 한 달 22일을 기준으로 일을 단순화해 인원을 계산한다. 그러나 이 기준은 고무줄과 같아서, 단위당 소요 시간을 조금 키우거나 줄임에 따라 결과는 모자라거나 남는 것으로 마구 변한다. 이런 요구를 받을 때마다 나는 항변하곤 했다. 고무신을 만드는 공장이라면 몰라도 엔지니어링이나 기술 부서를 그렇게 계량화하는 것은 얼토당토않다고.
생각으로 하는 일은 대부분 숫자로 재단할 수 없다. 컨베이어벨트 위를 흐르는 공산품과 달리, 변수도 많고 고려할 요소도 다르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는 획일적으로 일하는 시간을 규제하고 있다. 물론 이렇게라도 하지 않은 시절에는 과도한 근로시간이 있었음도 부인하지 않는다. 사회 초년병 시절, 정부에 시스템을 납품하며 1년에 걸친 설치와 시험을 마치고 준공서류를 제출하던 때였다. 수만 개 회로의 시험성적서를 만들기 위해 일주일 내내 밤을 새웠다. 퇴근은커녕 쪽잠조차 자지 못한 채, 새벽녘 책상에서 한두 시간씩 졸며 버텼다. 지금 생각하면 돌연사하지 않은 것이 다행이다.
현재 법정 근무시간이라는 52시간도 결코 적지 않다. 12시간까지 초과하여 일할 수 있다는 것은 하루 평균으로 치면 약 2.4시간이며, 퇴근 시간이 대략 9시 30분 경이다. 집에 가면 최소 10시는 넘을 것이니 운동이나 자기 계발의 시간도 여의치는 않다.
그렇다면 왜 이 시간이 여전히 논란일까. 공정과 절차가 명확한 생산 공장에서는 시간 단위로 업무를 계량하는 것이 가능하다. 그러나 사람의 생각으로 결과물을 만들어내는 업무를 시간으로 재단하는 것은 본질에 맞지 않는다.
초과근무라는 개념은 원래 블루칼라 노동자를 기준으로 만들어졌다고 한다. 그런데 우리는 개인의 역량은 고려하지 않은 채, 모든 직종을 오로지 시간으로 통제한다. 화이트칼라 역시 이런 통제와 계량화 당하기를 불편해해야 할 텐데, 꼭 그렇게는 생각하지는 않는다. 예를 들어, 나 같은 흡연자가 하루 대여섯 번의 흡연을 위해 자리를 비운다. 이를 시간으로 환산하면 얼추 하루에 한 시간은 족히 된다. 그러나 이런 것은 생각지 않고 퇴근 시간이 조금만 넘으면 초과수당을 거론한다. 이것은 과연 도덕적일까. 왜 스스로 속박당하며 사는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 것일까.
개인의 자유를 위한다면서 만든 이 제도가 오히려 그것을 해치는 예도 있다. 영화 일을 하는 아들이 우리나라 영화산업이 쪼그라진 데는 52시간 제도가 한몫하고 있다고 한탄한다. 예술 작업을 하는데도 근로시간을 지킨다는 말에 적잖이 놀랐다. 그래서인지 예전에는 밤샘 촬영과 주말 작업도 다반사로 하더니, 언젠가부터 영화를 찍을 때도 주말은 쉬고 있다. 나는 왠지 밤샘 촬영이나 강행군, 같은 것이 없는 영화에는 예술혼보다는 ‘상품’의 기운이 더 짙게 느껴진다. 그러다가 요즘은 아예 영화산업이 얼어붙어 계속 놀(쉬)고 있다.
원칙론자는 여전히 자본가와 노동자의 대립적 관념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한 듯하다. 회사 다니던 시절, 국내 최고기업과 중국 회사와 일을 했는데, 똑같은 일을 요구해도 국내 기업은 자주 기한을 맞추지 못했다. 그때마다 그 임원은 52시간 제도 때문이라며 하소연하던 기억이 난다.
반도체와 AI 전쟁이 불을 뿜고 있어도, ‘뛰어난 뺀질이’도 있고 ‘무능한 성실이’도 있다는 것을 생각하지 않는다. 이것을 고민해 보면 일하는 시간을 강제로 재단하는 것이 얼마나 무의미한지 알게 될 것이다. 이제 노동은 ‘얼마나 오래 자리를 지켰느냐’가 아니라, 목표를 향해 스스로 가속하고 멈출 수 있는 ‘선택의 권리’로 정의되어야 한다. 그것이 개인의 자율성을 존중하는 것이 아닌가. 많은 사람이 문제라는 것에는 동의하는 듯하지만, 논쟁만 반복된다. 결국 정치인의 ‘표’가 문제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