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정 서류가 필요해서 찾은 주민센터, 요즘은 웬만한 것은 무인 발급기로 일을 본다. 무료인 데다 내 시간도, 공무원의 시간도 아낄 수 있다. (내가 아껴준 시간에 공무원은 나라를 위해 어떤 큰일을 하겠지?) 하지만 지문인식기는 유리판에 얹은 내 손가락을 연신 거부한다. 손끝을 닦기도 하고 입김을 불어 온기를 더해봐도 ‘당신은 당신이 아니다’라는 차가운 기계음만 들려준다. 엄지손가락을 살짝살짝 위치를 바꿔가며 대어봤지만, 매번 퇴짜다. 인내가 다해 고장인가 싶을 즈음에야 기계는 “확인되었습니다”라며 선심 쓰듯 한마디를 던졌다. 그 후로도 갈 때마다 늘 그런 식이었다.
며칠 전엔 무인 발급이 안 되는 인감증명서를 떼러 창구에 갔다. 거기에서도 지문으로 나를 증명해야 하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창구 앞에 놓인 기계도 내 지문을 바로 알아보지 않았다. 공무원이 시키는대로 왼손 오른손, 엄지와 검지를 이리저리 바꿔가며 진땀을 빼고 나서야 간신히 나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었다. 불순한 사람으로 보였을까 괜히 얼굴이 따가웠다. 스마트폰에서는 스치기만 해도 주인을 알아보는데 나라의 기계는 왜 사람을 이렇게 몰라보느냐고 넌지시 따져 물었다. 돌아온 공무원의 답은 메말랐으나 나는 가슴이 서늘했다.
“선생님. 주민등록증 만들 때 등록한 지문이 세월이 흘러서 그렇습니다.” 지문이 변할까 생각했지만, 세월에 따라 흐릿해지기도 하고 뭉개지기도 한다는 말을 덧붙인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 그 지문은 열여덟 살, 생애 첫 신분증을 만들던 날에 남긴 흔적이었다. 그 지문 위에 무려 수십 년의 세월이 겹쳐 있는 지금의 지문을 댄 것이니 기계도 낯설었을까. 아니면 긴 시간을 지나며 겪은 내 몸의 풍파를 가계가 미처 다 읽어내지 못한 때문일까. 돌아오는 길, 주머니 속에서 가만히 엄지와 검지를 맞대고 비벼보았다. 예전에는 지문을 따라 오돌토돌하게 느껴지던 무늿결이 이제는 느껴지지 않는다. 그저 밋밋하고 매끄럽기만 하다. 세월이라는 거친 연마석에 내 몸의 무늬가 조금씩 갈려 나간 모양인가?
동물은 흔적을 남기려는 본능이 있다. 사람은 이름을 남긴다지만, 그 흔적은 대개 물리적인 표식을 하는 방식에 머문다. 그 욕망에 누군가는 유명 관광지에 이름을 새기고, 강아지도 배설 뒤엔 꼭 뒷발차기를 해서 자신의 흔적을 널리 퍼뜨린다.
내 흔적은 무엇이 남아있는가. 학창 시절의 그것은 아직도 학적부나 졸업증명서로서 학교에 잠자고 있을 테고 거쳐 온 회사에도 내 이름이 남아있겠지만, 그것이 '나'라는 실존의 흔적일지는 모르겠다. 명예라는 이름의 형이상학적 흔적은 미래에도 영구히 남겠지만, 그런 것은 평범한 사람에게는 과분한 욕심이다. 나 같은 필부는 미래는 고사하고 60여 년 살아온 자취의 자그만 조각조차 찾기가 쉽지 않다. 세상의 모든 소유물은 본디 내 것이 아니었으나, 태어날 때부터 내 것이었고 지금도 내 몸의 일부인 지문마저 그럴진대….
주민센터 직원은 지문을 새로 등록할 것을 권했다. 매번 겪는 번거로움을 덜어내라고 말이다. 하지만 나는 그냥 두기로 했다. 인식되지 않는 그 지문이야말로, 시월의 하늘보다 푸르렀던 열여덟 살의 나를 증명하는 유일한 물리적 ‘아카이브’이기 때문이다. 비록 앞으로도 기계가 나를 거부하며 더디게 알아봐 줄지언정, 나는 그 ‘낡은 흔적’을 통해 과거의 나를 만날 것이다. 그때마다 내 몸이 남긴 그 오래된 흔적을 통해 막 피어나던 청춘을 다시 만나는 일이 기쁠 것 같기도 하다. 세월에 닳아 매끄러워진 손끝으로 나는 오늘도 내 안의 청춘을 만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