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고의 뜻도 모르면서...
얼마 전, 사흘이 4일이 아니고 왜 3일이냐는 의문을 표현하는 누리꾼으로 인해 또 한 번 국민의 문해력 수준에 대해 갑론을박이 있었다. 문해력이란 문장을 이해하는 능력이니, 사흘에 대한 논쟁(?)은 문해력이라기보다 단어 지식의 부족이라고 함이 더 맞는 말로 생각된다.
글이란 진솔해야 한다는 것을 귀에 못에 박히도록 들어왔다. 글은 누가 보지 않더라도 자신 내면의 성찰과 표현이니 진솔해야 하고 따라서 맞춤법이나 단어도 정확히 사용해야 한다는 생각이 당연히 들 수밖에 없다. 그러나 글을 쓰면서 그동안 무심코 사용하던 단어들이 그 정확한 뜻을 제대로 알지 못하고 사용하던 단어가 매우 많음을 알게 되어 혼자 얼굴을 붉히는 일이 잦아지고 있다. 이에 진솔(?) 해야 한다는 뜻에 따라 나의 무지도 이야기해보고자 한다.
사흘을 4일로 알고 있는 정도는 아니지만, 책을 읽다 보면 모르는 단어가 한두 개가 아닐 때도 있다. 그것은 순수 우리말을 많이 사용된 소설류인데, 특히 박완서 님의 소설에서는 이런 단어가 있었나 할 정도로 낯선 단어가 문장 곳곳에서 마치 도로의 과속방지턱처럼 읽는 눈을 멈춘다. 이런 순수 우리말을 모른다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지만, 많은 사람이 그럴 것이니 부끄러운 축에서 다소 비껴서 있어도 괜찮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나의 무지는 다른 데 있었다. 우리말 단어의 다수가 한자어여서 한자의 뜻을 모르면 그 단어의 정확한 뜻을 이해하기 어렵다. 그나마 중학교 시절 일 년, 그리고 고등시절도 이과라서 일 년, 이렇게 짧은 시간의 한자 공부 이력을 밑천으로 그동안 무지를 들키지 않고 크게 부끄러움이 없이 지내왔는데, 글을 쓰고부터는 그 밑천의 한계가 자꾸 드러나고 있음이 한탄스러울 때가 있다.
먼저, 뜻을 알고는 있었지만 각 글자의 한자는 잘못 알고 있었던 것도 있었다. 불후의 명곡이라고 할 때의 ‘불후’를 不後로 알고 있었다. 어설픈 한자 실력으로 뒤가 아니라(없다)는 뜻이니 다시 나오지 못할 예술품이나 물건 등이구나 생각하여 後를 사용하겠지 생각했으나, 불후는 ‘不朽’였다. 즉 썩을 朽(후)-썩지 않는다는 뜻이었다. ‘유명을 달리하다’의 유명도 마찬가지이다. 생을 마감했을 때 사용하는 말인즉 有命, 즉 있는 목숨이 다했다라고 해석했었으나, ‘幽明’(저승과 이승)이 맞는 글자였다. 집안의 대를 잇는 장자를 가리킬 때 사용하는 주손도 主孫(주된 손자)로 알고 있었는데, 그러나 ‘胄孫‘인 것을 알고는 혼자 얼굴이 붉어졌다. 이 모든 것이 얼마 전에야 알게 된 사실이다.
그중에 가장 부끄러운 것은 ‘퇴고’라는 단어이다. 작가가 가장 많은 정성과 시간을 들이고, 글을 마지막으로 마무리하고 펜을 놓을 때 사용하는 ‘퇴고’ 말이다. 나는 이 단어를 철석같이 退稿로 알고 있었다. 글을 완성하고 마지막으로 원고를 물리는 것으로 생각하여 退(물러날 퇴)와 稿(원고 고)를 쓴다고 생각했는데 정식으로 문자 공부를 깊이 하지 못한 내게는 무리가 아니었다. 오히려 한글만 보고도 적절한 한자를 유추해 낸 것에 나의 한자 능력이 이 정도면, 하는 자만을 가질 정도였다. 그런데 얼마 전에야 퇴고가 ‘推敲’(밀 퇴, 두드릴 고)임을 알게 되었다. 정말 나의 무지가 어이없는 지경에 있음에 얼굴이 붉어질 정도가 아니라 웃음이 나오기에 이르렀다. 퇴고(推敲)의 유래에 대해서는 나 말고는 세상 사람들이 다 알고 있을 것임으로 이를 다시 글로 적는 것은 매우 성가신 일이다.
그다음, 관용적으로 사용하는 말은 어떤 경우에 사용하는지는 알겠는데 그 뜻이 무언지를 모르는 것들이 있었다. 예를 들면 ‘모골이 송연하다.’라는 것 같은 경우이다. 어느 날 그것을 자판으로 치다 보니 갑자기 ’모골‘과 ’송연‘을 따로 떼어 보니 그 뜻을 도통 알지를 못하였다. 모골은 그래도 털(毛)과 뼈(骨)인가 하며 찾아보니 맞았으나, ’송연(悚然)’의 정확한 뜻은 사전을 찾아보고야 그 뜻을 알게 되었다.
요즘 우리 국민의 문해력이 심각하게 저하되었음이 자주 지적되고 있다. 몇 년 전에 회자하였던, ‘마마 잃은 중천공(남아일언 중천금’), ‘일해라 절해라(이래라저래라)’, ‘삶과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삼가 고인의...)’, ‘골이 따분(고리타분)‘같은, 방송용 개그인가 하는 정도의 어이없는 실체들이 스마트폰으로만 지식을 습득하고 책을 읽지 않는 일부 젊은이에 대한 우려겠지만 이것만이 문제가 아닌 것 같다. 근엄한 정치권이나 관료사회에서도 잘 못 사용하는 말들이 있다.
정치권에서 자주 사용하는 ‘금도를 넘었다.’라는 것에서의 ‘襟度’는 ‘다른 사람을 포용할 만한 도량’의 뜻인데, 禁度-금지한 정도를 넘었다고 오해되어 사용되고 있고, ‘不偏不黨’(불편부당)도 ‘아주 공평하여 어느 쪽으로도 치우침이 없음’이라는 긍정의 말인데, 불편(不便)하고 부당(不當) 한 것으로 오해되어 완전히 다른 의미로 버젓이 사용되고 있으니, 나와 같은 사람이 많기는 많나 보다.
그러나 퇴고의 뜻글자도 모르면서 오늘도 퇴고 비슷하게 끙끙대다가 간신히 펜을 내려놓은 지경인데, 남의 형편을 지적하고 웃어 봐야 무엇하겠는가. 이렇게 사용해야 하는 단어와 글자까지 잘못된 앎을 가지고 글을 쓴다고 덤비고 있으니 한심하기가 이를 데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