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동틀무렵 Apr 24. 2024

상처를 준 녀석이 생각나(1)

누구나 상처를 주었던 사람이 있겠지. 나도 마찬가지야. 초등학교 시절에 같은 반이었던 녀석이었어. 그 녀석은 두 번이나 상처를 주었어. 그 기억은 머릿속에 똬리 틀고 있으면서 잊히지 않아.

 

누구나 먼 기억 속의 사람이 지금은 어디서 무엇이 되어 무엇을 할까 궁금해하지. 나도 마찬가지야. 때때로 그 녀석이 어디서 무엇을 하며 살고 있는지 궁금해 미칠 지경이야. 사회적으로 꽤 성공해서 유명인이 되었을까 싶어 인터넷에서 검색해보기도 했어. 하지만 이름이 나오지 않는 것을 보면 아주 크게 유명하거나 성공한 것이 아닌 것은 분명해. 다행이야. 아니면 질투가 날 것 같거든.      


두 개의 상처 이야기를 해볼게. 사실 상처라기보다 추억이야. 그중 하나는 오히려 얼마나 좋았던지 고마울 지경이었어. 사실은 고마워해야 할 대상은 그 녀석이 아니고 선생님이지만 말이야. 뭔지 궁금하지? (오백 원은 받지 않을 거야)     


초등학교 4학년 때였어. 녀석은 인근의 다른 학교에서 전학을 와서 같은 반이 되었어. 녀석이 그전에 다니던 학교는 교육대학 ‘부속 초등학교’였어. 부속 초등학교의 위엄은 모두 알고 있겠지. 부유한 집안의 아이들만 다니는 학교라는 걸. 모든 부속 초등학교가 다 그럴걸. 봐봐. 우리는 겨울을 빼곤 맨발에 검정 고무신을 신고 다녔지만, 걔들은 발목 위에서 한 겹 접은 하얀 양말에 운동화를 멋들어지게 신고 다녔지. 그 모습에 우리는 벌써 반쯤은 기가 죽었었어. 우리가 고무신을 신고 축구를 하면 훌러덩 벗겨진 고무신이 공보다 더 멀리 날아가곤 했지만, 걔들은 축구하기에 좋은 신발을 신었어도 요란스럽게 뛰어놀기보다는 바이올린을 배운다든가 하며 우아하게 보내는 부류들이었어. 이야기가 옆길로 빠지네.      


여하튼 그 녀석은 그 좋은 부속 초등학교에 다니다가 왜 우리 학교로 전학을 오게 되었는지는 나중에야 알게 되었어. 녀석의 엄마가 우리 학교 선생님이었거든. 또 녀석의 집도 우리 학교가 더 가까웠던 이유도 있었을 거야. 나중에 친해져서 녀석 집에 놀러 가보니 큰 기와집에 정원이 있었고, 연못도 있었던 것 같아. 방안에는 ‘어깨동무’나, ‘새 소년’ 같은 어린이 잡지가 널브러져 있었지. 또 주눅이 들었고 부러웠어. 만화라면 사족을 못 쓰고 뭐든지 읽기를 좋아했지만 그런 것은 언감생심 그림의 떡이었거든. 그건 그렇고 본론을 시작해야 하는데 왜 자꾸 이야기가 옆길로 빠지는 거지. 나이가 들어가나 봐. 옛 생각에 쉽게 빠지니 말이야.

   

녀석은 공부를 잘했어. 나처럼(ㅎ). 녀석은 그때 우리는 존재조차 모르고 있던 마이너스 숫자를 칠판에 적으며 뭐라고 떠들며 우리의 기를 죽이곤 했어. 사과 한 개가 있거나 없거나이지, 거꾸로 한 개가 있다는 것이 당최 이해 안 되는 나이였으니 무슨 귀신 씻나락 까먹는 소린가 했지. 선행학습의 결과였는지는 몰라. 여하튼 그런 것도 벌써 알고 있었다니깐.      


1학기 때는 선거를 하지 않고 선생님이 찍어서 녀석이 반장을 했고, 나는 부반장을 했어. 당시에는 선생님들은 공부를 잘하는 아이는 만능인 줄 알던 시대였어. 반장도 시키고 글짓기대회나 그림 그리기 대회 등, 모든 대회란 대회에는 공부 잘하는 아이를 내보냈어. 나도 그림 그리기나 백일장에 나가서 가작이니 입선이니 장려상이니 하는 상은 가끔 받은 것 같아. (선생님은 늘 옳아) 지금에 생각하니 자질과 특기를 깔아뭉갠 교육이었네. 하여튼 난 반장을 하지 않은 것이 너무 좋았어, 남보다 받아쓰기나 더하기 빼기를 좀 더 잘한 죄로 1학년 2학기 때부터 원치 않은 반장을 줄곧 했거든. 근데 내 적성이 아니었어. 반장은 자습 시간에 떠든 친구를 선생님께 고자질하거나, 심지어 친구를 체벌하기도 했어. 선생님을 등에 업은 완장을 찬 심리 같은 것이 발동하는 모양이야. 난 성격상 그런 짓(?)이 정말 싫었는데 선생님도 은근히 그런 것을 바라서 늘 내적 갈등이 있었거든. 또 방과 후에 남아서 시험 채점이나 교실 미화 작업등 선생님을 도와야 하는 일이 꽤 많았어. 신나게 놀아야 하는데 말이야.     


그렇게 행복한(?) 1학기가 지나고 2학기가 되자 새로 반장과 부반장을 선거로 뽑기로 했어. 모두가 알고 있는 그런 풍경이야. 누군가가 누구를 추천하여 후보를 정하고, 손을 들거나 종이쪽지에 마음에 드는 후보자 이름을 써서 투표함에 넣는, 그런대로 모양을 갖춘 민주 선거였어. 나도 당연히 후보 중 하나였어. 나를 추천한 친구가 너무 얄미워 책상 위를 날아가 이단 옆차기라도 하고 싶었지만, 태권도를 못 배워서 참았어. 그날은 이름을 적어내는 방식이었어. 왠지 비장한 분위기 끝에 드디어 개표가 시작되었어. 헉! 그런데 내 이름이 줄줄이 나오는 거야. 한 학기를 보내고 보니 그 녀석이 친구들에게 인기가 없었던 거야. 녀석은 떠든 아이 고자질 같은 반장 본연의 역할을 잘했거든. 마치 잘못한 정권을 심판하듯 아이들은 그 녀석에게 준엄한 심판을 한 것이고 착한(?) 나에게 몰표를 준 거야. 이름이 불릴 때마다 가슴이 덜컥 덜컥 내려앉았어. 난 깊이를 모르는 심연으로 빨려 들어가는 아득함과 초조함에 다리만 달달 떨고 있었어.      


그렇게 3/4 정도의 개표가 진행되고 있었어. 그대로 끝나면 내가 반장이야. 그때였어. 선생님께서 지휘봉으로 탁자를 탕탕 내리치면서 말씀하셨어. ‘투표 다시!’. 조금은 격앙된 표정과 목소리였어. 반 친구들은 그 상황이 어리둥절했지만 어린 마음에도 모두가 그 의미를 눈치챘어. 우리 학교 선생의 아들인 그 녀석이 반장이 안 되면 우리 선생님 체면이 안 서겠구나, 그래서 선생님께서 투표 다시!라고 외친 것임을. 재투표 결과는 정말 다행이었어. 그 녀석이 다시 반장으로 선출되었고 나는 차점자로 부반장이 되었거든. 난 정말 기뻤어. 큰 짐을 내려놓은 듯 길게 숨을 내쉬었어. 집에 가서 부모님께도 이야기하지 않았어. 다만 한동네 살던 같은 반 여자애가 동네방네 소문을 내서 두 살 위였던 걔 오빠가 분하다고 씩씩대긴 했어. 어린 마음에도 같은 동네에서 산다는 것과 부잣집 아이에 대한 반감 같은 것이 그런 분개를 표출했는지 몰라.      


걔네 집은 마을 끝쯤에서 돼지 몇 마리를 키우며, 아버지가 동네를 다니며 똥 푸는 일을 했어. 걔는 초등학교 졸업하자마자 서울로 식모살이 갔어. 그 어린 나이에 식모살이 갔다는 소식을 듣고 맘이 아팠던 기억이 나. 게다가 몸집도 아주 자그마했던 아이여서 더 마음이 아파. 걔 오빠도 보고 싶네. 두 살 위였지만 친구처럼 지냈던 형이야. 중학교 졸업하고 서울로 돈 벌러 갔으니 지금쯤은 둘 다 같은 서울 하늘 아래 있겠는걸. 난 그때 걔 아버지의 직업을 동경해서 커서 똥 푸는 일을 할까도 생각했어. 우리 집에서 똥을 퍼갈 때 어머니께서 돈 주는 걸 보았는데 그 똥을 강 건너 농촌에 퇴비로 팔 때 또 돈을 받는다고 들었거든. 사고팔 때 모두 돈을 받는 직업이 세상에 어디 있겠어. 그 시절에도 그런 블루오션이 있었던 거지. 멋진 직업이지 않아?


난 진짜로 좋았어, 선생님께 전혀, 한점, 일말의 원망도 없었어. 그때나 지금도. 그 일은 진즉에 내 기억에서 사라졌을 건데, 그 일보다는 그 녀석이 잊히지 않아 덤으로 따라오는 기억일 뿐이야. 선생님은 진정 존경스러웠어. 아이들 공부시키는데 열정이 매우 크신 분이라서 매도 수없이 맞았지. 얼굴도 정말 그리스 조각 같은 미남이셨어. 우리 담임일 때 결혼했는데 내가 청첩장을 가지고 인근 전화국과 시청에서 근무하던 선생님 지인들에게 전달했던 기억도 나. 선생님은 교장보다 더 높은 교육장까지 하시고 정년 퇴임하셨지. 6학년 때는 그 선생님은 다른 반의 담임이셨어.


퇴임 소식을 듣고 그 반 반장과 반 아이들이 주축이 되고 다른 반 반장을 했던 친구들도 같이 참석해서 정년 퇴임 축하연도 열어드렸어. 나는 또 5학년부터 졸업할 때까지 내리 반장을 했기 때문에 당연히 참석했었지. 졸업하고 근 30년 만에 처음 뵈었어. 큰절을 드리니 대뜸 너는 판사를 하고 있을 줄 알았는데 공대 나와서 회사원 하고 있다며 실망하시던 모습이 생각나. 회사원이 뭐 잘못된 것도 아닌데 왠지 죄송했지. 판사 운운은 선생님의 덕담이었겠지 뭐. 난 그때 반장 선거는 입 밖에도 내지 않았어. 선생님은 기억에 없었을 거야. 정말 훌륭한 선생님이었어. 이태 전 여든이 조금 넘은 너무 이른 연세에 별세했어. 코로나 시기라서 가서 마지막 인사를 드리지 못했지만 진정 명복을 빌었어. 이게 첫 번째 이야기야.



작가의 이전글 둔감하게 살아가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