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시간을 내 마음대로

달력이 모두 빨간색

by 시아파파

육아휴직을 하고 가장 큰 변화는 나에게 주어진 24시간을 내 마음대로 쓸 수 있다는 것이다. 기계처럼 매일 똑같은 시간에 집에서 나와 회사에 가고, 똑같은 시간에 퇴근을 하고, 11시만 되면 잠들어야 했던 일상이 순식간에 사라져 버린 것이다. 일어나고 싶을 때 일어나고, 침대에 누워 시아와 장난을 치고, 먹고 싶을 때 밥 먹고, 놀고 싶을 때 놀고. 매일이 주말인 삶. 달력에 적혀있는 숫자들이 모두 빨간색으로 바뀐 삶이었다.


하루 일과 중 가장 큰 고민은 바로 '시아와 뭐 하고 놀까?'였다. 아무런 준비 없이 내려온 제주도. 주변에 시아와 놀만한 곳, 가볼 만한 곳을 찾는 게 급선무였다. 제주도에 내려온 이상 아내와 나의 초점은 오로지 시아였다. 시아에게 평생 잊지 못할 추억을 만들어 주는 것.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이 이렇게 많은데 헛되이 보낼 수는 없었다. 그리고 대부분의 시간을 엄마와 둘이 보냈던 시아에게 지금의 시간은 아빠, 엄마와 함께 지내는 시간으로 만들어주고 싶었다.


시아 태어나기 전 일주일 전에 휴가를 받아 집으로 왔고, 시아가 태어나고 일주일 후에 곁을 떠나야 했다. 휴가는 딱 2주. 너무나도 짧은 시간. 하지만 이렇게라도 볼 수 있어서 행복했다. 해외에서 근무하는 사람들은 휴가 쓰기도 힘들고, 특히 출산은 날짜가 딱 정해져 있지 않기 때문에 휴가 날짜 맞추기도 힘들다. 다행인 것(?)은 시아가 역아여서 제왕절개를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 수술 날짜에 맞춰 휴가 계획을 세울 수 있었다. 시아도 아빠를 하루라도 더 보고 싶었던 모양이었나 보다. 갓 태어난 시아를 보고, 안고 있으니 떠나기가 너무 싫었다.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진짜 가야 하는 것인가. 너무 보고 싶어 돌도 안 지난 시아를 데리고 일하고 있던 태국으로 다 같이 갔다. 내가 지내던 호텔에서 우리 세 식구가 살게 된 것이다. 하지만 거기서도 대부분의 시간은 엄마와 둘이 보내야 했고, 좁은 호텔 방에서 말 못 하는 시아와 하루종일 방에만 있어야 했던 아내에게도 힘든 시간이었다.


3년 동안의 태국 생활을 끝내고 한국으로 복귀. 하지만 6개월 후 또다시 해외현장으로 나가게 되었다. 이번엔 이집트. 이집트 가기 전에 시아와 아내가 조금이라도 쾌적한 집에서 지낼 수 있게 첫 집 장만을 하여 이사를 갔다. 살던 집은 너무 좁고 낡아서 점점 커가는 시아에게 맞지 않았다. 다행히 우리가 원하던 집을 찾았고 새로 이사 온 집에서의 생활은 너무 만족스러웠다. 다시 떨어져야 하는 시간이 점점 다가왔지만 가기 전에 시아와 아내에게 조금이나마 선물을 줄 수 있어서 행복했다.

3살이던 시아가 5살이 되던 해 2년 동안의 이집트 생활을 마치고 한국으로 복귀했다. 너무 많이 커버린 우리 딸. 다행히 오랫동안 떨어져 있었어도 휴가 때마다 반갑게 맞아주는 시아가 너무 고마웠다. 주변엔 너무 오래 떨어져 있어서 자식들과 사이가 서먹한 집들이 많다고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새로운 집에서 시아와 오랫동안 살고 싶었다. 떨어지지 않고.


내 시간을 내 마음대로 쓸 수가 없었다. 나의 시간은 내 것이 아니라 회사가 가지고 있는 것 같았다. 회사에서 오라면 오고, 가라면 가고.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시간까지도 회사에 얽매여야 하다니. 너무 힘든 시간이었다. 하루도 아니고 한 달도 아니고 5년 동안의 시간이 내가 주인이 아니었다. 나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직장인들이 마찬가지일 것이다. 정말 이 관계를 깨뜨리고 싶었다.


'시아와 어떻게 하면 신나게 재미있게 놀 수 있을까?'를 생각하는데 문뜩 떨어져 있던 시간들이 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이때의 시간을 만회하고 싶었다. 시아에게 이제까지 해주지 못했던 것들을 이제는 마음껏 해 줄 수 있으니까. 육아휴직동안만큼은 내 시간에 대해 내가 주인이기에.

아빠와의 시간. 아이들에게 이보다 중요한 시간은 없다고 생각한다. 대략 5세까지는 엄마와 많은 시간을 보내고 엄마를 많이 찾지만, 6세부터는 아빠와의 시간을 많이 가질수록 아이들의 정서에 많은 도움이 된다고 한다. 그래서일까. 시아도 나를 잘 따르고 나도 시아와의 시간이 너무 행복했다. 떨어져 있었던 시간이 길었던 만큼 서로에게 바라는 것이 많았을 테니까. 가끔 떨어져 있고 싶을 때도 있었지만 그것도 잠깐. 다시 서로를 찾게 되고 많은 시간을 같이 보내는 것이 점점 더 편해졌다.


제주도 하면 바다.

집에서 20분만 나가도 바다가 보이고 해수욕장이 있다. 이제는 시간에 구애받지 않고 놀고 싶은 만큼, 가고 싶을 때까지 실컷 놀 수 있다. 여행이 아닌 제주살이니까. 제주도에 와서 가장 큰 장점이 이 것이다. 좋은 곳을 가도 다음 스케줄 때문에 더 머물지 못하거나, 다시 오고 싶은데 언제 다시 올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는 상황이 없다는 것. 더 머물고 싶으면 더 있고 싶을 때까지 있고, 또 오고 싶으면 내일이라도 바로 올 수 있으니. 이보다 좋은 게 또 있을까. 그것도 제주도에서. 여행하면서 가장 아쉬웠던 점들을 여기서는 모두 장점으로 바꿀 수 있었다. 육아휴직과 제주살이라는 두 가지가 만들어낸 선물. 너무 큰 선물을 받게 되어 항상 고맙게 생각한다. 이런 기회를 주시고, 이런 곳에서 살게 해 주셔서. 앞으로 시아와 좋은 추억들로 가득 차게 이 시간을 채워나갈 것이다.


제주도에서 유명한 협재해수욕장, 바로 옆이지만 덜 알려진 금능해수욕장 그리고 잘 알려져 있지 않은 금모래 해수욕장과 하모해수욕장. 모두 우리 가족이 자주 놀러 다니는 해수욕장들이다. 물놀이를 좋아하는 시아에게 해수욕장은 천국이나 다름없다. 모래놀이, 물고기 잡이, 수영 등 할 수 있는 것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 또한 초콜릿 박물관, 제주항공우주박물관, 신화월드 등 아이들 체험과 관람할 수 있는 곳도 주변에 많다. 이 모든 곳들이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갈 수 있는 곳으로 바뀌었다.


세상에 좋은 곳은 많다. 하지만 누구와 함께 하는가, 이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혼자 또는 친구와의 여행, 시간을 보낸다는 것도 좋지만 가족과 함께 좋은 곳에서 시간을 보내는 것이 가장 행복한 기억이 되지 않을까. 여행을 좋아하는 나에게 태국, 이집트에서의 생활은 좋은 기회였다. 그리고 좋은 기회로 만들었다. 하지만 내 인생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은 가족들과 함께한 순간들이다. 좋은 곳에서 비싼 음식을 먹었던 기억보다도 시아, 아내와 가까운 바닷가에 돗자리를 펴고 컵라면을 먹었던 시간들. 이런 시간들이 마음속에 더 찐하게, 더 생생하게 기억된다.


내게 주어진 시간을 가족들과 함께 한다는 것. 특히 하루 24시간을 오로지 가족들과 함께 보낼 수 있다는 것. 그 시간을 우리 마음대로 쓸 수 있다는 것. 내가 육아휴직을 한 이유다. 간절하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