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안, 쿠바

2018, 트리니다드의 골목에서...

by 루나

그때는 쿠바 여행 중이었다.

미국이 아직 쿠바로 가는 길을 완전히 닫기 전이었고,

카밀라 카베요가 Havana, ooh na-na를

끈적한 목소리로 불러대던 바로 그 무렵이었다.

벌써 나는 쿠바의 풍경과 문화를 그 뮤직비디오 속에서 알수 있었다.


사진은 여행 가이드가 데리고 간

트리니다드 근처의 마나카 이즈나가 탑

(Torre de Manaca Iznaga)이다.

이 탑은 한때 노예들을 감시하기 위해 세워졌고,

지금은 관광객에게만 열려 있는 장소가 되었다.


숨을 헐떡이며 꼭대기까지 올라가 보니

아이러니하게도 그 흑인의 후예들이

그곳에 좌판을 깔아놓은 상인들이 되있었다.

섣부른 나의 느낌이었는지는 몰라도 그들의 눈빛은 어딘가 슬펐고,

마치 그 시절 흑인 노예들의 시선을 닮아 있었다.


손수 만든 공예품을 들고 서 있던 그들의 표정은

명동의 좌판 상인들과는 사뭇 달랐다.

하나라도 더 팔아야 한다는 절박함보다는

핸드메이드의 자부심이 더 또렷해 보였달까.


무표정 안에는 희망보다 포기가 더 보였고,

그 침묵은 말보다 먼저 이곳의 현실을 설명하고 있었다.

그 포기는 체념이라기보다

오래 견뎌온 삶의 무게처럼 느껴졌다.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는 얼굴은

오히려 더 많은 것을 말하고 있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며

낭만으로 포장된 남미의 이미지 너머에

또 다른 얼굴이 존재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장면은 마음에 깊이 박혔다.


경쾌한 음악과 컬러풀한 건물,

빈티지한 올드카만을 기대하며 떠나온 여행이었지만

정작 쿠바 사람들의 삶은 늘 결핍과 함께 있었다.

‘마트’라고 쓰인 곳에 들어가 보니 선반은 텅 비어 있었고,

계산대에 앉아 있던 사람의 눈빛마저 텅 비어 보였다.

한 달 내내 화장지조차 구하기 어려운 현실,

호텔과 레스토랑에서는 아무렇지 않게 제공되는 물건들이

주민들의 일상에서는 아껴 써야 하는 것들이었다.


왜 나는 그런 현실을 미처 알지 못했을까.

아니, 어쩌면 알면서도 보지 않으려 했던 것은 아닐까.

나는 그들의 삶을 이해하려 하기보다는

그저 여행자로서의 편안함과

보기 좋은 장면만을 원하고 있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그 순간 깨달았다.

내가 바라본 하바나는 스스로 만들어낸 환상에 불과했을지도 모른다는 것을.

여행이란 눈부신 풍경을 수집하는 일이 아니라

그 땅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현실에

잠시라도 발을 들여놓는 일인데,

나는 그 사실을 잊고 있었다.


탑에서 내려오며 문득 부끄러움이 밀려왔다.

별로 언급하고싶지않지만,

샤랄라한 드레스를 입고 SNS에 보란듯이

예쁜 척 사진을 찍어 올릴 허영심과

그 풍경을 안전한 거리에서만 소비하려 했던 태도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곳 사람들의 결핍 앞에서

오히려 나는 초라하게 느껴졌다.

쿠바는 내게 화려한 색감보다

부족함 속에서도 살아내는 사람들의 강인한 눈빛을 남겼다.

그리고 그 눈빛은

지금도 여전히 내 마음을 붙잡고 있다.


만약 정권이 바뀌어

다시 쿠바에 갈 수 있는 날이 온다면,

나는 더 적게 기록하고

더 많이 머무는 사람이 되고 싶다.


헤밍웨이가 사랑했던 도시,

화려하고 열정 가득한 하바나 올드타운도 좋았고,

카리브해의 낭만이 흐르는 말레꼰 비치도 좋았다.

그러나 마음에 오래 남은 곳은

트리니다드의 골목들이었다.


그곳은 유난히 평화로웠고,

그래서 더 길게 머물고 싶어지는 곳이다.

그들의 눈빛을 바라보며

시장에 들러 식재료를 사고,

천천히 음식을 주문하고,

말보다 먼저 드러나는 표정을 읽으며

조용히 하루를 보내고 싶다.

여행자가 아니라

잠시 그곳의 리듬에 몸을 맡기는 사람으로

쿠바를 다시 만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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