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는 알래스카 오로라 여행이 무산되자 두 딸과 함께 크리스마스 빌리지를 보러 런던에 간다고 했다.
그리고, 오스트리아로 건너가 비엔나를 여행할 예정이라고 했다.
그러는 그녀는 내내 상기되, 그 설레이는 마음이 여기까지 전해졌다.
여행 스케줄은 마치 명품 여행 카탈로그의 페이지를 척척 넘기듯했고, 내 머릿속에서는 영화 속 장면들같았다.
런던의 반짝임, 비엔나의 음악, 알래스카의 빙빛 하늘이 차례로 떠올라 무척 부러웠다.
하지만 그 다음 순간, 마음 한쪽이 서늘하게 움푹 내려앉았다.
나는 그녀의 지난 상처와 고통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고, 오랫동안 불안과 걱정을 기도로 지켜왔던 사이이기 때문일까?
부러움 섞인 축하를 하면서도 설명할 수 없는 짙은 울적함이 얇게 엉켜버렸다. 그 미묘한 틈은 말로 표현하기는 좀 힘들지만... 그런 감정이었다.
그녀는 수십 년째 어떤이를 향한 분노를 품고 살아온, 겉모습과는 달리 마음이 늘 지친 사람이었다.
아무리 화려한 장면을 연출해도, 나는 그 속 어딘가에서 안쓰러움이 비쳐 보일만큼 우리는 가까운관계다.
그래서 더 힘이 되주고, 기도해주고 싶은 사람이다.
아마 그래서인지... 그럴 때가 있다.
아들 걱정, 내 몸 관리, 주변 관계들… 이미 마음의 체력이 낮아져 있는 날에는 누군가의 ‘하이라이트 장면’이 연달아 들려오면 마음이 털썩 주저앉는다.
사람의 마음이라는 건 빛나는 비늘처럼 가볍게 반짝이다가도, 누군가의 말 한 줄에 톡, 하고 눌리면 팍, 하고 욱신거린다.
나는 얼마 전 아들과 제주에서 보냈던 그 며칠의 행복이 떠올랐다.
화려한 아르떼 뮤지엄에서 수학여행온 아이들과 뒤섞여 덩달아 신이 났던 우리들.
바람이 잔잔한 중문색달해변에서처럼, 말없이 곁에 있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너울지던 시간들.
다행히 몸상태가 괜찮아 여러가지 함께 할수있었던 순간들.
내 가슴 안쪽에서 조용한 촛불 하나가 따뜻하게 켜지곤 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즐거워 보였던 그 얼굴.
그것은 내 마음에 아주 조용히, 그러나 단단하게 박힌 보석 같은 순간이었다.
어떤이들은 자주 겪을수있는 평범한 여행이라고 할수있지만 나에겐 희박한 현실이었기에 더 아름다운 여행이었다.
누군가가 더 멀리, 더 화려하게, 더 많이 다녀왔다고 해서 그 보석이 작아지는 건 아니지만, 비교라는 그림자가 잠시 스치면 보석의 빛이 희미해지는 착각이 든다.
그런 그녀에게, 나… 좀 짜증나고 우울하다고 해버렸다.
그녀는 잠깐 내 말을 받아들이더니,
내년 스페인 여행 우리 꼭 같이 가자고,
내 마음… 자기가 보상해주겠다고.
순간 멈칫했다. 마음을 보상해준다니.
엄마가 아닌 이상 누가 그런 말을 해줄 수 있을까...
그 말이 괜히 뭉클하게 다가와 나도 모르는 감동에 코끝이 찡했다.
찬바람불어 추운날 핫쵸코 한잔에 가슴이 녹아내리듯 나는 스르르 마음이 회복되었다.
나를 좋아한다는 뜻, 나를 신뢰한다는 뜻,
나를 그녀 삶의 한 자리에 두고 싶다는 뜻이니까.
미국에서 함께 살던 날들을 떠올리면, 지금도 마음 한쪽이 따뜻하게 데워지는 느낌이다.
어느 날은 서프라이즈라며 나를 차에 태워 Drive-Thru Christmas Light Show 반짝임 속으로 나를 데려갔던 그녀의 표정이 떠오르고, Descanso Gardens Halloween Pumpkin Light Night 티켓을 끊고 아이처럼 들뜬 목소리의 그순간들이 또 생각났다.
그리고, 그녀가 데리고간 남미여행중 어느 오래된 성당에서 유아 세례를 받는 아이들을 함께 보았다.
그녀가 문득 아픈 우리아들을 생각하며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눈물을 흘렸다.
여행중에 마주한 설렘과 슬픔이 뒤섞인 감정이 마음 깊숙이 스며들었고, 나는 그 마음을 함께 나누는 듯했다.
그 외에도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감사와 소중한 순간들이 마음속에 차곡차곡 쌓여 있다.
그런 기억들을 하나씩 꺼내다 보면 나는 그녀의 인생을 응원하지 않을 수가 없다.
진심으로, 깊이, 오래 축복하고 싶다.
그때의 불빛과 공기와 웃음이 지금의 나를 조용히 밀어주는 기적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감정은 때때로 오래된 엘리베이터처럼 움직여 중간 중간 멈칫거리다가도 마침내 꼭대기층까지 올라간다.
나는 지금 그 중간층쯤에 있을 뿐, 곧 투명한 겨울 공기처럼 마음이 다시 맑아질 것이다.
결국 나는 알고 있었다.
나를 진짜 흔드는 건 그녀가 말한 화려한 크리스마스 빌리지가 아니라, 지쳐 있던 나의 마음이다.
그리고 내가 지키고 싶은 행복은 이미 내 안에, 아들과 함께한 그 조용한 빛 속에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