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효된것은 김치만이 아니었다

by 루나

한국에 와서 맞이한 첫 김장날이었다.

시댁에는 부엌이 두 개 있었는데, 그동안 김장은 늘 넓은 바깥 부엌에서 하셨다고 했다.

시동생과 남편은 추운 날씨를 걱정하며 내게 패딩 조끼를 내밀고, 작은 난로를 여기저기 놓아주었다.

하지만 시어머니는 “무슨 난로가 필요하냐. 옛날엔 추운 날 콧물 닦아가면서 하는 게 김장이었다.” 하신다.

그 말에 나는 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다.


‘그래, 이게 바로 한국식 풍습이지!’

그 순간, 오래된 한국 겨울 풍경이 눈앞에 펼쳐졌다.

처마 밑 고드름은 반짝이고, 지붕에는 눈이 소복이 내려앉은 어느 시절.

하얀 입김을 뿜으며 자주색 고무다라이 앞에서 부지런히 손을 놀리던 어머니들의 그림자까지도.


나는 핑크 고무장갑을 끼고, 시어머니의 설명을 들으며 내 몫의 배추를 따로 버무렸다.

시어머니 역시 평소처럼 당신의 방식대로 따로 김장을 하셨다.

같은 날, 같은 부엌에서 담갔지만 결과는 놀라우리만큼 달랐다.


정성 들여 담근 내 김치는 김치냉장고 속에서 시간이 지나도 좀처럼 맛이 들지 않았다.

아삭해야 할 숨은 금세 죽고, 깊어야 할 맛은 끝내 제자리를 찾지 못했다.

양념이 부족했던 걸까, 아니면 서툰 내 손끝에서 빠져나간 온기와 기다림 때문이었을까.


하지만 시어머니의 김장은 달랐다.

노환으로 기운이 없으시다가도 김장을 할 때만큼은 눈빛이 다시 살아났고, 손놀림은 경쾌했다.

몇십 년의 시행착오 끝에 쌓인 노련미…

그것이 바로 세월이 빚어낸 맛이었다.


그러다 문득, 미국에서 병마와 싸우던 시절이 떠올랐다.

몸도 마음도 지쳐 있던 때, 한 친구가 정성껏 담근 김치를 보자기에 싸서 가져다준 적이 있다.

“언니, 건강해야 해. 이 맛있는 김치 먹고 얼른 일어나자. 자고로 보증금은 빼줘도 내 김장김치는 못 빼줘.”

장난스러운 말투였지만, 그 속엔 절절한 마음이 있었다.

그 김치는 세상 어떤 위로보다 귀한 선물이었다.

그런 김치가 일일드라마에서는 겨우 ‘김치싸대기’ 소재로 소비된다니, 씁쓸함이 밀려오기도 했다.


친구가 김장을 시작한 이유 또한 기억에 남는다.

아들이 김치를 그다지 좋아하는 것도 아니었는데, 매년 “올해는 김장 안 해?”라고 묻곤 했다고 한다.

이유는 의외였다.

김장날이면 집 안 가득 퍼지는 수육 삶는 냄새, 그 국물로 끓이는 된장국의 깊은 맛,

그리고 무엇보다 배추잎에 양념을 발라 엄마 손으로 입에 쏙 넣어주던 그 순간을 좋아했다고 했다.

그 한마디가 얼마나 사랑스러웠던지, 그 이후로 친구는 김장을 거를 수 없었다고 했다.

김장은 맛보다 먼저 ‘사랑’이라는 사실을 그때 알았다.


나에게도 그런 비슷한 순간이 있었다.

아들은 한국에 오자마자 나와 ‘헤어질 결심’을 했고, 1년 뒤 LA로 돌아가 버렸다.

예전 대학 기숙사 때의 이별과는 달리, 태평양을 사이에 둔 작별은 훨씬 더 무거웠다.

나는 매일 바닥에 드러누운 사람처럼 무력했고, 아무리 철없는 해맑좌라 불리던 나라 해도 그때만큼은 쉽게 웃을 수 없었다.


몇 달 뒤, 방학을 맞아 돌아온 아들은 전보다 훨씬 마르고 얼굴 피부도 거칠어져 있었다.

나는 괜히 태연한 척하며 물었다. “제일 먹고 싶었던 게 뭐였어?”

아들은 주저 없이 대답했다. “엄마가 만든 김치김밥.”


그 말이 어찌나 반갑고 고맙던지 마음이 갑자기 급해졌다.

서둘러 재료를 사서 부엌으로 달려갔다.

아들이 좋아하는 시금치 된장국을 끓이고, 새밥을 지어 김치를 꼭 짜내 밥 위에 올렸다.

어릴 때 종종 만들어 주던 그 김치김밥은 별것이 없었다.

따끈한 밥과 잘 익은 김치, 계란, 햄이 들어간, 소소한 맛이었다.


그 김밥이 아들의 입으로 들어가는 순간, 내 안의 허전함이 스르르 메워졌다.

아마도 그것은 김밥의 맛 때문이 아니라, 다시 이어진 마음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지금도 스스로에게 묻는다.

김치란 과연 무엇일까.

단순히 발효된 배추일까, 아니면 정성과 기다림이 켜켜이 쌓인 시간일까.

혹은 가장 소박한 방식으로 건네는 사랑의 또 다른 이름일까.


김치는 결국 우리에게 ‘함께’라는 말로 돌아온다.

짭짤하고 매콤한 맛 속에 스며드는 건, 다름 아닌 사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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