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결국… 역마살을 품고 살아야 하는 운명이었다.
20대 초반, 그 빛나던 청춘의 한복판에서 아메리칸 드림이 뭔지도 모르던 철부지 나이였던 나는 부모님 멱살잡혀 미국행 비행기에 올랐다.
마치 뮤비 주인공처럼, 한 장짜리 One way ticket~을 쥔 채,
설레는 건지 두려운 건지 모를 마음으로 새로운 대륙에 발을 내디뎠다.
그리고 세월은 흘러, 참 아이러니하게도…
그때의 내 부모처럼 나 역시 청춘인 아들과 시즌2 멱살잡기 한국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역이민이라는 이름의 또 다른 모험이랄까... 이쯤 되면 역마살이 대물림 아닌가 싶다.
천만다행으로, 나는 늘 사람복이 많았다.
이민생활 30년을 정리하는 그 순간, 내곁에는 아낌없는 박수와 응원을 보내주는 지인들이 많았다.
서로의 인생을 뜨겁게 응원하며 함께 쌓아온 추억들, 이별의 순간에 나눈 편지와 마음들은 마치 자손만대 가보로 간직해야 할 만큼 소중했다.
이민생활의 마침표가 결코 쓸쓸하지 않았던 건, 우주의 기운과 하늘의 인연덕분인 이웃사촌들 덕분이었다.
그렇게 한국 땅에 다시 발을 붙이고 나니, 신기하게도 오래도록 그리워했던 ‘찐사촌’들과의 극적인 상봉이 기다리고 있었다.
전쟁을 겪은 엄마의 칠남매. 거기서 태어난 사촌만 열네 명.
누구는 멀리 해외에, 누구는 이미 세상을 떠나…
결국 한국에서 얼굴을 볼 수 있는 사촌은 단 세 명뿐이었다.
나는 여덟 살까지는 할머니와 함께 시골에서 살던, 말 그대로 시골쥐였다.
풀벌레 소리 들으며 뛰놀던 그 시절, 세상은 단순하고 온화했다.
그러다 어느 날, 서울로 올라오면서 나는 서울쥐로 변신해야했다.
하지만 화려한 서울은 내겐 너무 낯설고 벅찼다.
그래서 한동안은 활발하던 시골쥐가 아닌, 주눅든 서울쥐가 되있었을때 만난 사촌들... 그중에서도 공주같던 나의 사촌언니.
아름답고 세련된 숙모옆에 껌딱지같이 붙어있던 언니는 서양인형같은 모습에 이 시골쥐는 선뜻 다가가지 못했던 기억이 난다.
온실 화초처럼 자랐을 언니를 상상하며 오랫만의 재회에 가슴이 뛰었다.
역시, 나의 예상은 틀리지 않았다.
치과의사 형부와 함께 안정된 삶을 일궈온 언니는, 서울 근교에 살면서 주말이면 강화도 시골 동화같은 곳에서 살고있었다.
어릴적 환상에 머물러있던 언니는 스님같은 무채색 옷차림에 앞치마를 둘러 수수한 모습과 대조되는 밝고 큰미소로 나를 반겨주었다.
미대를 졸업한 언니가 집을 디자인하고, 치대를 나온 형부가 직접 작은 모형틀을 만들어 소박하게 지었다고 했지만, 내 눈에는 결코 소박하지 않았다.
데크와 다락방, 지붕 위까지 감각적으로 설계된 그 공간은 오히려 한 편의 건축 작품처럼 보였다.
마치 일상 속에 숨겨진 작은 성(城) 같았다.
집 안으로 들어서자, 테이블 위에는 들판에서 막 꺾어온 듯한 야생화가 무심한 듯 꽂혀 있었고, 언니가 직접 블렌딩한 건강차가 은은한 향을 퍼뜨리며 우리를 맞이했다.
그 모든 디테일에서 느껴지는 정성과 세련됨이라니... 한국판 마사 스튜어트 느낌적인 느낌?
몇십 년 만에 마주한 언니는, 처음부터 끝까지 내게 따뜻한 환대를 쏟아냈다.
그날은 뒷마당 장독대 돌솥뚜껑에 올린 고기를 구우며 <슬기로운 농촌생활>을 촬영하듯 반가움의 회포를 풀었다.
헤어질 때, 손에 꼭 쥐여준 강화도의 명물 가래떡과 강냉이 한 자루, 정성들인 텃밭 채소들...
마지막 순간까지 친정언니처럼 챙겨주었다.
비가 몹시 쏟아지던 날, 또다시 언니네 강화도집을 방문했을때 집 안 가득 퍼진 갓 구운 빵 냄새에 나는 부끄럽지만 살짝 황홀했다.
유리창에 부딪히는 빗방울 소리와 고소한 향기가 어우러져, 그 순간은 마치 베이커리카페 CF의 한 장면 같았다.
빵순이인 나에겐 이것이야말로 언니만의 각별한 웰컴 인사였다고 느꼈다.
잠시 후, 언니는 텃밭에서 막 따온 채소와 막 구운 바게트빵으로 정성껏 샌드위치를 만들고는, 접시에 담아 내왔다.
반짝이거나 화려하진 않은 접시였지만, 무언가 특별함이 느껴졌다.
알고 보니 언니가 직접 빚어 구운 도자기였던 것이다.
접시 한쪽에 새겨진 이니셜JW는 시중의 그 어떤 명품보다도 멋졌고 자부심이 보였다.
그 순간, 삶의 품격은 거창한 것이 아니라, 매일의 정성이 깃든 손끝에서 조용히 피어나는 것임을 알 수 있었다.
그후로도 만날적마다 언니가 런칭한 치과브랜드 제품들을 쇼핑백 하나가득 담아주는 넉넉함...
그 속에 담긴것은 포근한 미소와 다정한 마음이었다.
그 옛날 내기억속의 서양인형은 너무나도 따뜻했다.
하지만 곱게만 살아서 그런 건 결코 아니었다.
겉으로는 늘 단정하고 수수한 모습이었지만, 그 뒤에는 수많은 굴곡이 숨어 있었다.
어린 시절 부모님의 헤어짐으로 인해 남들보다 일찍 외로움을 느꼈을 언니, 명문대를 가는 길은 험했을것이며, 아들셋을 키우면서 강해야만했을, 그래서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던 시절, 친정오빠의 간호와 죽음으로 애썼던 날들, 텃밭을 일구며 서툴렀던 시행착오의 경험들...
지나온 시간만큼 단단하게 빛나고 있었다.
언니의 잔잔한 미소와 깊은 눈빛에서 그 모든 이야기가 말없이 전해졌다.
나는 문득 생각했다..
닮고 싶고, 본받고 싶은 그 귀한 존재가 한국에 있다는 사실과 찐사촌이라는 그것이야말로 얼마나 든든한 큰 축복인가...
LA에선 한국이 고향이었고, 한국에 돌아오니 미국이 고향이 되어버린, 조금은 애매한 나의 정체성.
그래서 한국은 늘 익숙하면서도 낯설었는데, 사촌 언니와 오빠를 만나면 그 모든 경계가 사라진다.
나는 이곳 사람이 아니어도 괜찮고, 저곳 사람이어도 괜찮다.
행복해서 따뜻한 것이 아니라, 따뜻해서 마음이 놓인 시간.
그 사실 하나만으로 이 땅에서의 삶이 한결 단단해졌다.